교육 1373

하늘이 처음 열리던 날

하늘이 처음 열리던 날 오래된 골목길 돌아다니길 좋아하시나요? 아침에는 삶이 바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낮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 나누는 곳. 개, 고양이, 개미까지 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돌아다니는 곳. 그들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곳.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그 골목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신화와 옛이야기는 그런 골목길 같습니다. 사람이 되려고 동굴에 들어간 곰과 범 이야기, 단군신화. 동굴을 뛰쳐나온 범이 그 후 어찌 되었는지 정말 궁금했죠. 10월 3일은 하늘이 처음 열리던 날, 개천절입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왕검이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 중 하나죠. 민족 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

엄마에게 고추보다 매웠던 것

엄마에게 고추보다 매웠던 것 흙 마당 낡은 멍석 위에 고추 무더기와 엄마가 마주 보고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고추씨가 달그락거리도록 잘 마른 것, 껍질이 눅눅하여 덜 마른 것, 병들고 벌레 먹어 희끗희끗한 희나리, 세 가지로 분류하며 고추를 고른다 붉은 무더기 고추가 작은 동산 셋으로 높아져도 손이 아리다거나 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제비 새끼 먹이 달라고 서로 주등이 내밀듯 여덟 남매가 아침이면 돈 달라고 손을 내미는 날들이 간난한 살림 꾸려갈 앞날이 고추보다 매웠을 것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이태에 한 번꼴로 애경사를 치러가며 못 먹어 입이 비틀어지도록 지난한 삶에도 굴하지 않던 엄마 가끔씩, 구름 속에 들어가 눈물 닦고 나온 달이 맑은 가을빛이다 -구정혜 시, < 출처 : 행..

통제사의 적벽 선유

통제사의 적벽 선유 동파선 놀던 임술년 가을을 다시 맞이하여 풍악 울리며 배 가는 대로 맡기네. 바다 하늘 보니 달이 더욱 밝고 통제사의 검기로 시 지어 보네. 이제야 밝은 해가 누각을 둘러싸고 새삼 미풍이 타루에 불어오는 걸 알겠네. 천하 뭇 생명들이 말갛게 익기를 생각하니 어디에 가야 눈썹에 시름이 없어질까. 蘇仙壬戌重逢秋소선임술중봉추 簫鼓中流任去留소고중류임거류 滄海天光多月夜창해천광다월야 元戎劍氣作詩遊원융검기작시유 始知爀日圍官閣시지혁일위관각 轉覺微風拂舵樓전각미풍불타루 大地群生思濯熟대지군생사탁숙 眉頭何處可無愁미두하처가무수 - 신헌(申櫶, 1810~1884), 『위당집(葳堂集)』〈임술년 7월 16일 공주도에서 뱃놀이하다.[壬戌秋七月旣望舟遊拱珠島]〉 위당(葳堂) 신헌(申櫶, 1810∼1888)은 19세기 ..

'책'이라는 물건의 아이러니

'책'이라는 물건의 아이러니 언젠가부터 나는 책을 쉽게 읽는다. 책을 읽을 때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책의 저자와 내용에 별다른 권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저 점심 먹고 잠깐의 개운함을 위해 마시는 카페모카 한잔과 같다, 일회용 컵을 버리듯 책도 쉽게 버린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책이 ‘저렴한 물건’ 이라는 깨달음도 한몫했다. 책이 저렴한 혹은 상대적으로 ‘싸구려 물건‘이 라는 조금 극단적인 깨달음은 책에 대한 내 오랜 의문 하나를 더 크게 만들었다. 나는 커피를 잘 못 마시지만, 하루에 아이스 카페모카 한 잔은 늘 마시는 편이다. 간단한 점심식사 후 아이스 카페모카와 머핀 하나를 먹는 것은 내 오랜 즐거움이다. 카페모카는 한식이 주는 약간의 텁텁함을 달콤한 개운함으로 바꿔 주는 신기..

그토록 하늘빛이 밝은날이면

그토록 하늘빛이 밝은 날이면 헛된 생각이 내달릴 때 한 점 구름 없는 하늘빛을 우러러 바라보면 그 많던 생각들이 깨끗이 사라지니 바른 기운이 들기 때문이다. 정신이 맑을 때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바위 하나, 냇물 한 줄기, 새 한 마리, 물고기 하나를 가만히 살펴보면 가슴속에 안개와 구름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나며 흐뭇이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하다. 그러다 내 무엇을 깨달았던가 다시 헤아려보노라면 도리어, 아득해지는 것이다. 妄想走作時, 仰看無雲之天色, 百慮一掃, 以其正氣故也. 且精神好時, 一花一草一石一水一禽一魚靜觀, 則胷中烟勃雲蓊, 若有欣然自得者. 復理會自得處, 則却茫然矣. 망상주작시, 앙간무운지천색, 백려일소, 이기정기고야. 차정신호시, 일화일초일석일수일금일어정관, 즉흉중연발운옹, 약유..

어느날, 책속의 한 글귀가 내 인생을 흔들었다

어느날, 책속의 한 글귀가 내 인생을 흔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가슴 한구석을 쿡 찌르는 듯한 글귀를 만나기도 합니다. 책의 한 글귀가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을 수 도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책속에서 만난 것일 수 도 있겠죠.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였던 책 속 글귀를 기억하고 있나요? 무미건조했던 일상 속에서 나를 흔들었던, 의미 있는 글귀들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누구나 언제든 슬럼프가 온다. 새로운 일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고 일상이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유한한 삶 속에서도 오늘이라는 시간이 리필 되니, 다시 그 길 위에서 힘을 내 볼 일이다. 밤을 새워 해매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이 모든 ..

생각의 계절

생각의 계절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지 않으면 잃는다. 天下之理, 思則得之, 不思則失之. 천하지리, 사즉득지, 불사즉실지.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삼봉집(三峯集)』권4, 「사정전(思政殿)」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새 도읍지인 한양의 궁과 건물들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정도전의 문집에는 그렇게 이름 지은 의도를 담은 글이 실려 있는데, 위 문장 역시 그 중 사정전의 뜻을 설명해놓은 글 일부다. 사정전은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수행하던 궁의 주요 건물 중 하나로, 이곳에서는 아침조회가 열려 나랏일에 관한 중요한 의논들이 오갔다. 낡은 기존의 통치를 개혁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치가 시작되는 건물인 만큼, 정도전이 사정전이라는 이름에 부여한 의미 역시 상당히 무거웠을..

우리 집은 내리막에 있었다

우리 집은 내리막에 있었다 내리막 우리 집 우리 집은 내리막에 있었다 엄마는 우리 집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작고 초라한 연립 주택이어도 좋은 집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한겨울 눈이 내리면 대형 마트 배달 트럭도 올라오지 않는 곳 친구들이 가끔 아주 가끔 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너는 겨울에 눈썰매장 안 가도 되겠다고 학교 가는 길이 내리막이라서 늦게 일어나도 빨리 갈 수 있겠다고 재미로 하던 말에도 상처받던 날들 이웃 어른들이 오르막에 있어서 수해는 안 입겠다고 언덕 위의 집이 좋은 집이라고 다독여 주어도 내리막에 지은 집만 같던 우리 집 마음속으로 아무리 강한 척해 보아도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내리막으로만 보이는 집으로 가는 길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본 집 앞 언덕길을 다 올라 집 앞에..

당신을 여전히 두근거리게 하는 일이 있나요 ?

당신을 여전히 두근거리게 하는 일이 있나요 ? “오랜만에 만나니 더 예뻐졌어요!” 지나가는 인사일지도 모르지만, 그 남자의 말은 오늘 내 가슴을 새콤달콤하게 만들었습니다. 내 나이요? 인생의 중간쯤 왔을까요. 사십대가 된지 몇 년 지났지만, 마음은 사실 사춘기 소녀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닌 척, 드러내지 않는 것일 뿐이죠. 이십대에 누구나 연애 경험이 있으리라는 건 대단한 착각일지 모릅니다. 사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애틋한 청춘에 대한 상상을 불러 모아. 선택한 청춘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걸지도 모르죠. 마스다 미리, 일본의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를 아시나요? 69년생 마스다 미리는 오사카 출생의 만화가이자 에세이스트입니다. 마스다 미리는 수많은 공감만화와 에..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 주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 사헌부 지평 이세광이 아뢰기를, “……신은 주상이 궐내에 화공(畫工)을 모아놓고 초목과 금수를 본떠 그리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전하께서 그림 그리는 일에 마음을 두시니 외물(外物)을 완호(玩好)하는 마음이 점차 심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이번에 화공에게 본떠 그리도록 명한 일이 어찌 완호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림은 비록 정치와 상관이 없으나 예복(禮服)에 놓는 수는 그림이 없으면 만들 수 없으니 본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왕 없을 수 없다면 또한 그 기술을 정교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왕의 영정을 고쳐 그리거나 중국 사신이 그림을 구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림 그리는 일을 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