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872

네 글자에 마음을 담아

네 글자에 마음을 담아 혼이 나갈 듯한 이별에 좋은 시절은 다하였네 몇 번이나 밝은 달은 차고 기울었나 악기의 줄이 끊어진 후 세월은 흘러만 갔구나 홀로 잠드는 이 밤 기러기 무리 날아드네 아련하여라 아련하여라 아련하여라 아련하여라 내 마음 묶인 듯 답답하여 등불이 꺼지도록 잠 못 이루네 방안은 물속처럼 이불은 쇠붙이처럼 차갑구나 책상에 기대 앉아 비단 휘장 드리워 본다 깊은 근심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쌓인 시름이 얼마나 되려는지 심란하여라 심란하여라 심란하여라 심란하여라 驚魂別 佳期歇 경혼별 가기헐 幾回明月盈還缺 기회명월영환결 朱絃斷 流光換 주현단 유광환 一宵孤夢 數行歸鴈일소고몽 수행귀안 漶 환 漶 환 漶 환 漶 환 心如結 燈將滅 심여결 등장멸 洞房如水衾如鐵 동방여수금여철 憑書案 垂羅幔 빙서안 수라만..

'산비리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을 찾아서

'산비리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을 찾아서 오래된 길에 사람 자취 사라져 울긋불긋 이끼가 끼었는데, 산이 속세를 떠난 게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났구나! 古徑無人紫蘚斑, 山非離俗俗離山. 고경무인자선반, 산비리속속리산. - 황준량(黃俊良), 『금계집(錦溪集)』 권2 「2일 유신(維新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속리산을 유람하는 김중원(金重遠 김홍도(金弘度))에게 부치다[二日 到維新 寄金重遠遊俗離山]」 어느새 바람도 제법 쌀쌀해지고 일교차도 커지면서 반팔을 입은 사람들도 부쩍 줄었다. 조금 더 있으면 곱게 물든 단풍을 즐기러 산행(山行)에 나설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단풍 명소의 하나로 속리산(俗離山)을 꼽는데, 이 산에 관한 명구로 ‘山非離俗俗離山’이 자주 회자(膾炙)된다. 인터넷을 훑어보니 이 구..

담배를 키우다 얻은 교훈

담배를 키우다 얻은 교훈 초여름에 나는 남초가 어떻게 자라는지가 보고 싶어서 일찍 심은 북쪽 이웃집에서 몇 모를 얻어와 뒤뜰 서쪽에 심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4, 5월의 어름에 날씨가 가물어 가는 때라 구름과 안개는 걷혔으며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싸늘하였으니, 심어놓은 모들이 그을리거나 말라 안타깝게도 소금에라도 절인 것처럼 시들해졌다. 그래서 질그릇과 고리버들 그릇, 나무바가지와 표주박, 광주리, 돗자리와 발 등의 잡다한 물건들을 찾아와서 햇볕이 가려지도록 덮었으니,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날이 기울면 다시 치우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하였다. 또 계집종과 사내종 두어 명에게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어 뿌리게 하고 혹 너댓새마다 떡잎을 따고 호미로 흙을 북돋게 하였다. 그랬더니 남초가 자라는 ..

통제사의 적벽 선유

통제사의 적벽 선유 동파선 놀던 임술년 가을을 다시 맞이하여 풍악 울리며 배 가는 대로 맡기네. 바다 하늘 보니 달이 더욱 밝고 통제사의 검기로 시 지어 보네. 이제야 밝은 해가 누각을 둘러싸고 새삼 미풍이 타루에 불어오는 걸 알겠네. 천하 뭇 생명들이 말갛게 익기를 생각하니 어디에 가야 눈썹에 시름이 없어질까. 蘇仙壬戌重逢秋소선임술중봉추 簫鼓中流任去留소고중류임거류 滄海天光多月夜창해천광다월야 元戎劍氣作詩遊원융검기작시유 始知爀日圍官閣시지혁일위관각 轉覺微風拂舵樓전각미풍불타루 大地群生思濯熟대지군생사탁숙 眉頭何處可無愁미두하처가무수 - 신헌(申櫶, 1810~1884), 『위당집(葳堂集)』〈임술년 7월 16일 공주도에서 뱃놀이하다.[壬戌秋七月旣望舟遊拱珠島]〉 위당(葳堂) 신헌(申櫶, 1810∼1888)은 19세기 ..

그토록 하늘빛이 밝은날이면

그토록 하늘빛이 밝은 날이면 헛된 생각이 내달릴 때 한 점 구름 없는 하늘빛을 우러러 바라보면 그 많던 생각들이 깨끗이 사라지니 바른 기운이 들기 때문이다. 정신이 맑을 때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바위 하나, 냇물 한 줄기, 새 한 마리, 물고기 하나를 가만히 살펴보면 가슴속에 안개와 구름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나며 흐뭇이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하다. 그러다 내 무엇을 깨달았던가 다시 헤아려보노라면 도리어, 아득해지는 것이다. 妄想走作時, 仰看無雲之天色, 百慮一掃, 以其正氣故也. 且精神好時, 一花一草一石一水一禽一魚靜觀, 則胷中烟勃雲蓊, 若有欣然自得者. 復理會自得處, 則却茫然矣. 망상주작시, 앙간무운지천색, 백려일소, 이기정기고야. 차정신호시, 일화일초일석일수일금일어정관, 즉흉중연발운옹, 약유..

생각의 계절

생각의 계절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지 않으면 잃는다. 天下之理, 思則得之, 不思則失之. 천하지리, 사즉득지, 불사즉실지.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삼봉집(三峯集)』권4, 「사정전(思政殿)」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새 도읍지인 한양의 궁과 건물들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정도전의 문집에는 그렇게 이름 지은 의도를 담은 글이 실려 있는데, 위 문장 역시 그 중 사정전의 뜻을 설명해놓은 글 일부다. 사정전은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수행하던 궁의 주요 건물 중 하나로, 이곳에서는 아침조회가 열려 나랏일에 관한 중요한 의논들이 오갔다. 낡은 기존의 통치를 개혁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치가 시작되는 건물인 만큼, 정도전이 사정전이라는 이름에 부여한 의미 역시 상당히 무거웠을..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 주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 사헌부 지평 이세광이 아뢰기를, “……신은 주상이 궐내에 화공(畫工)을 모아놓고 초목과 금수를 본떠 그리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전하께서 그림 그리는 일에 마음을 두시니 외물(外物)을 완호(玩好)하는 마음이 점차 심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이번에 화공에게 본떠 그리도록 명한 일이 어찌 완호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림은 비록 정치와 상관이 없으나 예복(禮服)에 놓는 수는 그림이 없으면 만들 수 없으니 본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왕 없을 수 없다면 또한 그 기술을 정교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왕의 영정을 고쳐 그리거나 중국 사신이 그림을 구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림 그리는 일을 어찌..

잠 못 드는 그대에게

잠 못 드는 그대에게 오십 년을 살 사람은 백 년 살 걱정을 하고, 백 년 살 사람은 천 년 살 걱정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은 또 즐거운 것이 아니다. 五十之人, 有百歲之憂, 百之人, 有千歲之憂矣. 此長生又不足樂也. 오십지인, 유백세지우, 백지인, 유천세지우의. 차장생우불족락야. - 이만용(李晩用, 1792∼1863), 『동번집(東樊集)』권4, 「매변(寐辨)」 동번 이만용은 부친 박옹(泊翁) 이명오(李明五), 조부 우념(雨念) 이봉환(李鳳煥)과 함께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예원(藝苑)의 거장(鉅匠)이 이들이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가 맞이했을 정도였다. (정원용, 『經山集』권12,「泊翁集序」) 이봉환과 이명오는 문재를 인정받아 1748년과 1811년에 서기와 제술관..

가을을 기다리며

가을을 기다리며 정신없이 농가의 일 수고롭다가 가을 들어 잠시 잠깐 틈 얻고 보니 단풍 물든 언덕에는 기러기 날고 비 맞은 국화 둘레 귀뚜리 울며 목동은 피리 불며 안개 속 가고 나무꾼은 노래하며 달빛 속 오네 일찍 주워 모으기를 사양 말게나 산 배 산 밤 텅 빈 산에 널렸을 테니 搰搰田家苦골골전가고 秋來得暫閑추래득잠한 雁霜楓葉塢안상풍엽오 蛩雨菊花灣공우국화만 牧笛穿煙去목적천연거 樵歌帶月還초가대월한 莫辭收拾早막사수습조 梨栗滿空山이율만공산 - 김극기(金克己, 1150(추정)~1209), 『동문선(東文選)』 제9권, 「오언율시(五言律詩)」. 참 징그럽게도 덥다. 지금쯤이면 한 풀 기세가 꺾일 만도 한데 아직도 한낮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8월 8일이 입추(立秋)였고, 8월 10일이 말복(末伏)이었으니 그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