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아버지의 얼굴

백광욱 2023. 8. 25. 00:05

 

아버지의 얼굴

 

< 번역문 >

주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 사헌부 지평 이세광이 아뢰기를,
  “……신은 주상이 궐내에 화공(畫工)을 모아놓고 초목과 금수를 본떠 그리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전하께서 그림 그리는 일에 마음을 두시니 외물(外物)을 완호(玩好)하는 마음이 점차 심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이번에 화공에게 본떠 그리도록 명한 일이 어찌 완호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림은 비록 정치와 상관이 없으나 예복(禮服)에 놓는 수는 그림이 없으면 만들 수 없으니 본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왕 없을 수 없다면 또한 그 기술을 정교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왕의 영정을 고쳐 그리거나 중국 사신이 그림을 구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림 그리는 일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최반과 이세광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폐지하길 원한 것이 아닙니다. 무릇 임금은 무엇을 아끼고 좋아하는 일을 삼가야 하니 아끼고 좋아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폐단이 발생합니다.” 하였다. 주상이 노여운 목소리로 승지에게 소리쳤다.
  “그림 그리는 일을 폐지하라!”

 

 

< 원문 >

御經筵。 講訖, …… 世匡曰: "……臣聞禁內會畫工, 摹寫草木禽獸。 ……殿下留心畫事, 恐有玩物之漸。" 上曰: "……今之命工摹畫, 豈爲玩好而然哉? 圖畫雖不關政治, 上衣下裳黼黻文章, 非畫不得, 則固不可無。 旣不可無, 則亦不可不精其術也。 脫有先王御容改畫事、中國使臣求畫者, 其可廢圖畫乎?" 崔潘、世匡等啓曰: "臣等非欲廢圖畫也。 大抵人君當謹好尙, 好尙之極, 必有其弊。" 上厲聲呼承旨曰: "其罷圖畫事。"

 

- 『성종실록(成宗實錄)』 9년 8월 4일 1번째 기사

 

 

< 해설 >

성종 9년 가을. 어느 날부턴가 성종이 수상한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새와 초목을 구해 오게 하더니, 화공들을 궐내로 불러 모아 그것들을 똑같이 그리도록 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소문난 대사헌 김뉴(金紐)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까지 했다.

 

   결국 대간(臺諫)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궐내에서 그림을 그리게 한 것도 그렇고, 중책을 맡은 대사헌에게 그림 감독 따위를 맡게 한 것도 그렇고, 근래 지시한 사안들을 보니 임금이 그림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서화(書畫)를 좋아하는 것은 불길한 조짐으로 여겨졌다. 지난 역사를 돌아봤을 때 서화에 마음을 뺏겨 나라를 그르친 임금이 얼마나 많았던가. 당나라 현종(玄宗), 송나라 휘종(徽宗)과 같은 중국 황제들은 물론이고 바로 전조(前朝)인 고려에도 공민왕(恭愍王)의 사례가 있었다. 이 때문에 특히 경연 자리에서 신료들이 혈기 왕성한 청년 왕에게 ‘완물상지(玩物喪志)’를 언급하며 정치 외에 잡다한 취미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성종도 대간이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도를 해명했다. 근래의 일은 모두 화공의 그림 실력을 길러주기 위해 한 일이지 그림을 즐기려고 한 일이 아니었음을 밝히는 한편, 국가 중대사에는 그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런데 대간들의 반응이 좀 엉뚱했다. 그림을 즐기려고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못 들은 것인지, 또다시 그림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한 것이다. 결국 성종은 분을 못 이기고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냥 싹 다 없애버리라.’고.

 

   상황이 어찌 됐든 한 나라의 임금이 신하 앞에서 이토록 격앙된 태도를 보이다니 썩 훌륭해 보이는 장면은 아니다. 일견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취미를 들킨 부끄러움에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종이 그간의 수상쩍은 행보에 대해 해명하면서 ‘선왕의 영정(影幀 초상화)’을 언급한 순간, 내 마음이 성종을 진심을 믿어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 한 단어에서 성종이 10대의 소년 왕이었던 시절에 겪었던 특별한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종 3년의 일이다. 이해 성종은 선대(先代) 왕과 왕비(소헌왕후, 세조, 예종)의 영정과 대왕대비(정희왕후)의 영정, 그리고 친아버지인 의경왕(懿敬王)의 영정까지 총 5개의 영정을 제작했다. 영정 제작이 끝난 후에는 영정을 그린 화공들을 포상하여 벼슬을 올려 주었는데, 대간들이 이 조처에 크게 반발하여 한동안 조정이 소란스러웠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도화서 별제(圖畫署別提) 최경(崔涇)과 안귀생(安貴生)이었다. 이들은 기존 품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였으므로 이번에 벼슬이 오르면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게 되었다. 대간들은 잡직(雜職)인 화공에게 벼슬을 상으로 주는 것도 참람한 일이거니와, 화공이 당상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성종은 영정 제작이 선왕(先王)을 위한 사업이라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포상을 강행하려 했지만, 열흘이 넘도록 매일같이 빗발치는 항의에 결국 왕명을 철회하였다. 그러자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왕후가 나서서 대간들을 나무랐다. 성종이 그토록 화공들에게 벼슬을 주고 싶어 했던 진짜 이유를 밝히며 그 갸륵한 성심(聖心)을 기어코 꺾어버린 데에 대해 유감을 표한 것이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주상이 태어난 지 두어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의경왕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 최경 등이 그림을 그리니, 내가 봐도 참 닮았다. 주상이 진심으로 기뻤기에 그 공로에 보답하려고 했던 것이다.…….” 『成宗實錄 3年 6月 4日』

 

   성종의 친아버지인 의경왕은 세조가 잠저(潛邸) 시절에 얻은 맏아들로, 세조가 즉위한 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끝내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책봉 3년째 되던 해 9월에 급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성종이 태어난 것은 그해 7월 30일이니, 정희왕후는 두어 달[數月]이라고 했지만 실상 태어난 지 한 달여 만에 아버지를 여읜 셈이었다.

 

   사진도 동영상도 없던 시대였다. 태어난 직후 고아가 된 자식이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단은 그림뿐이었다. 그러니 의경왕의 영정이 제작되기 전까지 성종에게 아버지의 얼굴은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 모르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는 아버지를 닮아있을 형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자기 얼굴을 냇물에 비춰보며 그저 상상에 기대 그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만 해오던 아버지의 모습을 마침내 영정을 통해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성종의 감격은 어떠했을까? 더욱이 영정 속 의경왕의 모습을 보고 그의 친어머니인 정희왕후도 ‘참 닮았다’고 인정하였으니, 그 감격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숙주의 문집에 실린 ‘추모록서(追慕錄序)’에 따르면, 수년 전에 사망한 의경세자의 생전 모습이 이토록 생생히 영정에 담길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의 살뜰한 배려 덕분이었다고 한다. 의경세자의 병이 위독해져 그의 죽음이 확실해졌을 때 세조는 단장(斷腸)의 슬픔 속에서도 아들이 남긴 어린 손자들을 생각했다. 어린 손자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 마지막 모습을 남겨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물화로는 당대 최고라 일컬어지던 화공 최경을 불러 세자의 마지막 모습을 초도(草圖 밑그림)로 그리게 하였다. 성종이 의경왕의 영정을 제작할 때 바로 그 초도를 토대로 의경왕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고 하니 의경왕의 영정은 곧 세조가 성종에게 남겨준 유산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종이 그림을 좋아하고 즐겼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의 묘지문(墓誌文)에 ‘서화(書畫)는 오묘한 경지에 다다랐다.’라고 하였고 보면 성종이 그림에 대단한 실력을 지녔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보면 조선 전기에 그림을 보는 안목을 지닌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조선 전기 최고의 천재 화가로 불리는 안견(安堅)이고, 나머지 한 명은 성종이다. 이런 야담이 전해진다는 것은 당대에 성종이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소문이 궐 밖으로까지 퍼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림에 대한 이런 성종의 재능과 애호를 모두 아버지의 영정과 관련한 그 사연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성종이 갖가지 금수·초목을 모아 화공들에게 그림 훈련을 시키면서 ‘선왕의 영정을 고쳐 그리는’ 국가의 중대사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한 부분만큼은 이 사연에 비추어 봤을 때 진심 어린 말이었다고 믿어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진심은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알게 해준 소중한 그림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하는 자식으로서의 효성과 할아버지 세조가 자신에게 그랬듯 어버이를 여읜 후손들의 마음을 더욱 곡진히 어루만져 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글쓴이  :  최소영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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