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850

이름은 빌려와도 괜찮다

이름은 빌려와도 괜찮다 내실에 부끄러운 점이 없다면 이름은 빌려와서 붙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 實之苟無所媿, 名或借儗而無嫌. 실지구무소괴, 명혹차의이무혐. - 조귀명(趙龜命), 『동계집(東谿集)』 「왜려설(倭驢說)」 얼마 전 서울 모처의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 선배가 해 준 이야기이다. 선배가 사는 단지와 바로 옆 단지는 여러모로 조건이 비슷하고 집값도 비슷했다고 한다. 그런데 옆 단지가 이름을 ‘고급스럽게’ 바꾼 뒤로 집값이 훌쩍 뛰어버렸고, 이에 자극을 받은 선배 단지의 주민들이 우리도 바꾸자며 들고 일어나서 반상회와 ‘주민단톡방’이 조용할 날이 없다고 한다. 요즘 전에 없이 길고 화려한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자주 보인다. 지역명과 건설사 브랜드명 사이에 ‘퍼스트’, ‘센트럴’, ‘프레스티..

말하는 사람 수고롭고 침묵하는 이 편안하다

말하는 사람 수고롭고 침묵하는 이 편안하다 온갖 묘함이 나오는 근원 침묵만한 것이 없으리로다. 영악한 자 말이 많고 어수룩한 이 침묵한다 衆妙門, 無如默. 巧者語, 拙者默. 중묘문 무여묵 교자어 졸자묵 - 장유(張維, 1587~1638) 『계곡집(谿谷集)』 권2 「묵소명(默所銘)」 조선 중기의 문신인 장유는 침묵의 집, 묵소당을 짓고 이 명(銘)을 지었다. 그는 묵소명에 이어 묵소잠(默所箴)을 지어 다시 그 뜻을 나타내고자 했다. “조급한 자 말이 많고 고요한 이 침묵하며, 말하는 사람 수고롭고 침묵하는 이 편안하네.” 옛날의 현인들은 이렇듯 말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을 수양의 출발로 삼았다. 공자가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어진 이는 그 말을 삼간다고 했던 것”이나 인의 4가지 덕..

종정도(從政圖) 놀이

종정도(從政圖) 놀이 세간의 한가로운 이들이 모였을 때 할 일이 없으면 종이 몇 폭을 붙여 관직을 차례로 적은 뒤, 벼슬을 올리고 내리며 쫓아내고 등용하는 규칙을 붙이고 여섯 면이 되도록 깎은 나무의 각 면에 덕(德)‧훈(勳)‧문(文)‧무(武)‧탐(貪)‧연(軟) 여섯 글자를 새긴 주사위를 세 개 만든다. 다 갖추고 나면 몇 사람이 판을 앞에 두고 소리치며 주사위를 던져 얻은 끗수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강등시킨 뒤, 벼슬의 높낮이를 비교하여 승패를 결정한다. 이를 ‘종정도(從政圖)’라고 하니, 유래가 오래된 놀이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놀이를 좋아하지 않아 동류들이 하는 것을 보면 손을 저어 거절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호남에서 객살이를 할 때 하루는 우연히 들에 있는 정자에..

유년의 소멸

유년의 소멸 아이가 관례를 앞두고 그날이 다가오매 상투 틀고 갓 쓰고 나면 이제 어린 시절과는 작별이구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필시 땋은 머리를 자꾸만 어루만지니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다. 섣달 그믐날 석양마저 잦아드노라면 차마 마음 가누지 못하고 필시 석양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건 올해의 햇빛이 다만 여기서 그치기 때문이다. 又如童子將冠, 吉日旣逼, 心中以爲冠一加則童則別矣, 必頻頻手撫編髮, 人情之恒然也. 除日夕陽將落, 則情又不忍, 必細玩夕陽, 今年之日色, 只有此故也. 우여동자장관, 길일기핍, 심중이위관일가즉동즉별의, 필빈빈수무편발, 인정지항연야. 제일석양장락, 즉정우불인, 필세완석양, 금년지일색, 지유차고야.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48권 「이..

겨울 나기

겨울 나기 외진 곳, 무슨 일인들 청진하지 않으랴. 세모에 술병만 늙은이와 짝하네. 적막한 게 점점 좋아지니 시은이 다 됐으니 느긋하다 조롱하지 말라. 우리 집 가난하니. 엄동설한에 굶은 닭은 모이 찾지 못하고 추운 날씨에 병든 말은 땔감 운반 못 하네. 해가 길어져 얼음이 다 녹기를 기다렸다가 봄에 낚시대 하나 매고 교외 못에 가야지. 窮居何事不淸眞궁거하사불청진 歲暮甁罍伴老身세모병뢰반노신 漸喜寂寥成市隱점희적요성시은 莫嘲疏緩任家貧막조소완임가빈 鷄飢雪凍難尋粒계기설동난심립 馬病天寒叵運薪마병천한파운신 會待日長氷泮盡회대일장빙반진 一竿歸及野塘春일간귀급야당춘 - 임상원(任相元, 1638~1697), 『염헌집(恬軒集)』 〈세모(歲暮)〉 임상원(任相元)은 인조대 소론 문인으로 최석정(崔錫鼎), 최석항(崔錫..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 반송사(伴送使) 허종(許琮)이 하직 인사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오는 길에 명(明)나라 사신과 우리나라의 풍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신이 이르기를, ‘선대 황제의 실록을 만들 때 그 내용을 싣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믿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게 된다면 또한 다행일 것입니다. 예컨대 상제(喪制)나 직전(職田), 또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그 관직의 진출을 막는 것과 같은 사항들을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두 기록하여 신에게 보내도록 하소서. 그러면 신이 사신과 한담을 나눌 때 그 내용들로 부탁해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

고정 관념을 깬다는 것

고정 관념을 깬다는 것 앞 여울에 물고기 하도 많아서 마음먹고 물결 가르며 날아들려다 사람 보고 별안간에 너무 놀라서 여뀌 핀 언덕으로 되려 날아와 목 뺀 채로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가랑비에 털옷은 자꾸 젖지만 마음 외려 여울 고기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욕심 잊고 서 있다 하네. 前灘富魚蝦전탄부어하 有意劈波入유의벽파입 見人忽驚起견인홀경기 蓼岸還飛集요안환비집 翹頸待人歸교경대인귀 細雨毛衣濕세우모의습 心猶在灘魚심유재탄어 人導忘機立인도망기립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동국이상국집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2권, 「고율시(古律詩)」. 중 제2수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변하지 않는 굳은 생각이나 무엇인가에 대해 당연하다고 알려진 생각을 고정 관념이라고 하는데, 고정 관념은 종종 우리의 판..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물은 만 가지나 있지만 몸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몸은 여러 기관이 있지만 마음보다 귀한 것이 없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외물에 휘둘리는 것은, 어진 이는 하지 않는 것이다. 夫物有萬品, 莫重於身, 身有百體, 莫貴於心, 勞心以役物, 賢者之所不爲也. 부물유만품, 막중어신, 신유백체, 막귀어심, 로심이역물, 현자지소불위야. - 신작(申綽, 1760∼1828), 『석천유고(石泉遺稿)』 3권 「자서전(自叙傳)」 위의 문장은 신작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쓴 「자서전(自叙傳)」의 말미이다. 신작은 조선 후기의 경학자로, 부친은 신대우(申大羽)이며 모친은 정제두(鄭齊斗)의 손녀로 강화학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늦은 나이에 부친의 권유로 과거 시험을 보고 급제하였지만, 부친상을 당..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 사람은 만나는 일이나 만물을 접할 때에 대부분 내 생각과 같지 않은 데서 곧 불평이 생겨난다. 人遇事接物, 多因不如己意, 輒生不平. 인우사접물 다인불여기의 첩생불평 - 전우(田愚, 1841~1922) 『간재집(艮齋集)』 6권 「답홍주후(答洪疇厚)」 대관절 화라는 감정은 왜 주체 못할 지경에 이르러 결국 사태를 곤란하게 만들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칠정(七情) 중에서 가장 분란을 일으키기에 조심시켜야 할 감정은 바로 ‘노(怒)’이다. 분노라는 뜻의 한자 ‘분(忿)’을 파자(破字)해서 보면 ‘산산조각난 마음’이라 풀이된다.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지경에 도달하고야 만 마음. 그렇기에 어떻게든 표출되어야 할 마음이란 얘기다. 저자 전우는 홍주후라는 사람에게 답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