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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기에 대하여 - 이산해 글씨의 가파른 물매

백광욱 2024. 4. 23. 00:05

 

기울기에 대하여 - 이산해 글씨의 가파른 물매



〈정각(正覺)의 시권(詩卷) 앞머리에 쓰다[題正覺詩卷]
 
낚시질 그만두고 취하여 바위에 누워
물안개 자욱한 강가에서 탁영(濯纓)의 옛 노래 부르노라
평생 자연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늘그막에도 강가에 살고 있네
촌로와 자리나 다투며 지내는 몸이니
은자라 부를 것 없소이다
모래톱에서 웃으며 함께 가리키네
거울 같은 한강수에 또렷한 저 삼각산을
 
백발의 이 늙은 거사는
사문(斯文)에 노닐고 있는 몸이지만
정각(正覺)은 무엇 하는 사람이길래
이리도 간절히 시를 구하는가
함부로 쓴 오언시(五言詩)
종이 위에 비바람 몰아치는 듯하네
가지고 가 남에게 보이지 마시게
이제부터 문 닫고 숨어 살려 하나니

 

*취하여 바위에 누워: 원문의 ‘취석(醉石)’은 도연명이 취하여 누워 잤던 바위로서, 여산(廬山)의 명승지 중 하나.
*탁영(濯纓)의 옛 노래: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서,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란 구절이 나온다.
*은자라 부를 것 없소이다: 원문의 ‘하의(荷衣)’는 연잎으로 만든 옷인데, 전설 속 은자들이 입었다는 옷을 가리킴.
*종이 위에: 원문의 ‘계등(溪藤)’은 섬계등(剡溪藤) 즉 섬계지(剡溪紙)를 가리킴. 섬계지는 절강성 섬계(剡溪)의 등나무로 만든 이름난 종이.

 

醉石罷垂釣    취석파수조
煙波歌濯纓    연파가탁영
平生水雲癖    평생수운벽
暮年江海情    모년강해정
野老與爭席    야로여쟁석
荷衣休道名    하의휴도명
沙頭笑相指    사두소상지
三角鏡中明    삼각경중명

 

白髮老居士    백발노거사
遊戲於斯文    유희어사문
覺也何爲者    각야하위자
求詩辭意勤    구시사의근
胡寫五字詩    호사오자시
溪藤風雨飜    계등풍우번
持歸愼勿播    지귀신물파
從今深閉門    종금심폐문

-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아계유고(鵝溪遺稿) 권4 노량록(露梁錄), 〈정각(正覺)의 시권(詩卷) 앞머리에 쓰다[題正覺詩卷]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이자 문장가였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정각(正覺)이란 승려에게 써서 준 시다. 이 시는 이산해의 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 권4에 수록되어 있는데, 따로 전하는 이산해의 친필 원고에는 제목에 ‘관악산인(冠岳山人)’이라는 네 글자가 더 있어서 ‘정각’이 관악산의 절에 있던 승려임을 알 수 있다. 『아계유고』는 모두 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앞 3권이 ‘기성록(箕城錄)’으로서 이산해가 기성 즉 평해(平海)에 유배된 동안 지었던 시문을 수록했다. 그가 평해에 정배된 해는 일본의 침략 전쟁이 발발했던 1592년 임진년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기성록’의 기록에 따르면 그 이전에 지었던 시문은 전쟁으로 거의 소실되었다고 한다. 『아계유고』 권4는 ‘기성록’처럼 그가 (기성록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의 지명 등 생애 활동의 연고를 따서 이름을 지은 14개의 ‘록(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시가 수록된 ‘노량록(露梁錄)’은 권4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산해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62세였던 1600년(선조33) 이후 은퇴하여 여러 곳을 옮겨다녔는데, 1607년(69세)에는 노량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한적한 은거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문집의 체재나 연보의 기록 등 위와 같은 각종 정황을 종합해 보면, 이 시는 이산해의 최말년기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에서 자신을 ‘백발의 늙은 거사’라 칭했고, 원고본 말미에 ‘아계노인’이라 써있는 점도 시작(詩作)의 시간적 배경을 짐작케 한다. 
 
  시는 담담하고 평이하다. 첫 수는 여러 유명한 은자의 고사를 원용한 시구를 구사하며 여유롭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은거 생활을 그렸고, 둘째 수는 승려인 정각이 찾아와 시를 요청한 사연을 직서(直敍)하고 남에게 보일 것 없는 시를 되는대로 써 주노라고 말했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공신 봉호까지 받은 고관이었던 신분의 이가 승려의 청에 응하여 준 것이어서 색다른 수사나 심오한 주제 없이 편안하게 썼다. 다만 이산해의 시를 두고 후대에 회화성이 높다 평가한 예가 종종 있는데, 노량진 백사장 앞을 흐르는 맑은 한강에 비친 북한산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정다운 모습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보듯 그려낸 첫 수 마지막 연의 솜씨에서 과연 그러한 평가가 나올만했음을 수긍케 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문학적 가치를 논하기 힘든 평범한 시이다. 이 시의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원고의 글씨에 있다.
 

 ▲이산해(李山海), 〈제관악산인정각시권(題冠岳山人正覺詩卷)〉, 지본묵서(紙本墨書), 세로23.5cm, 개인 소장
  
  아계 이산해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로 이름이 났다. 대여섯 살 무렵부터 대자서(大字書)를 썼는데, 붓을 쥐고 뒤뚱거리며 써낸 커다란 글씨가 기운 넘치고 훌륭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구했다고 한다. 글씨 신동 이산해의 일화는 사위였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쓴 묘지명이나 후대에 채제공이 지은 신도비 뿐 아니라, 거의 당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그의 글씨가 꽤나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글씨는 남아있지 않으나, 중년 이후에 쓴 큰 글씨의 편액이 몇몇 남아 전하고 있어서 그 서풍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광조 신도비〉 등 묘도문자 글씨도 찾아볼 수 있다.
 
  편액이나 묘갈문 등 어느 정도 법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 글씨에서 쓴 사람의 개성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이산해 특유의 맛이 잘 드러나는 글씨는 주로 행초서다. 
 
  이산해의 행초서는 변화무쌍하고 자유롭다. 또한 활달하며 기운이 넘친다. 보는 이마저 활발발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저 글씨의 멋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두 기본 자료이다. 채제공의 〈이산해 신도비〉에는, 아버지(이지번)가 벽에 붙여두었던 황고산(黃孤山)의 초서를 유모의 품에 안겨있던 이산해가 좋아하며 손가락으로 획을 그어 더럽혔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황고산’은 황기로(黃耆老, 1521~1575?)를 가리킨다. 고산 황기로는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초서 서가(書家)이다. 이들은 빠른 운필로 서사(書寫)한 변화미 넘치는 짜임새의 초서를 구사했는데, 이들의 자유분방한 초서는 일세를 풍미했으며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산해의 행초서 또한 이들의 서풍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생몰년 및 활동 기간으로 볼 때, 황기로의 글씨를 이산해가 배웠다기보다 황기로 등 선배 초서 대가들과 동시대의 서풍을 함께 호흡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황기로(黃耆老), 〈경차(敬次)〉(부분), 26×110cm, 개인 소장, 보물
  
이산해, 황기로 등 조선 중기 초서 대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을 꼽는다면, 우선 명나라의 서예가인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 1425~1487)을 들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이덕형의 묘지명 또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벽에 붙은 글씨의 주인공이 장필이라 되어 있다. 당시 장필의 초서가 유행했음을 말해주는 몇몇 증좌가 있다. 퇴계 이황은 〈정자중(鄭子中: 정유일鄭惟一)의 한거(閒居) 이십영에 화운(和韻)함(和子中閒居二十詠)〉(『退溪集』 권3)이라는 시에서, “오흥(吳興, 조맹부)을 익히다가 옛 훌륭한 글씨까지 망칠까 걱정되며, 동해(東海, 장필)를 흉내내다가 허황된 글씨나 쓰게 될까 염려되네(學書吳興憂失故 效嚬東海恐成虛)”라고 말한 바 있다.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조선 전기 글씨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장필 즉 ‘장동해(張東海)’가 당대 조선의 글씨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조맹부가 여러 글씨체에 모두 능통했으며 서예 뿐 아니라 다방면에 영향력이 컸던 원대(元代) 문화계의 거인이었던 반면에, 장필의 특장은 글씨 중에서도 초서 방면에 한정되었던 탓이 크다. 그러나 적어도 초서라는 글씨체에 한해서는 장필의 글씨는 조선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글씨를 판각한 법첩이 전해지기도 하고(ex. 『동해옹초격(東海翁草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친필 묵적도 전래되고 있다. (〈장필진묵(張弼眞墨)〉, 권벌 종가 유묵, 보물, 충재박물관 소장) 장필의 글씨는 운필(運筆, 붓놀림), 결구(結構, 글자의 짜임새), 장법(章法, 페이지 레이아웃) 모두 파격적이다. 구불구불 길게 내리그은 필획, 급격한 기울기의 사선과 커다란 둥근 동세의 호(弧)를 포함한 균형감을 결여한 글자 짜임, 그리고 글씨 간 크기의 급격한 낙차가 이루는 변화미 등등의 요소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찔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장필진묵(張弼眞墨)〉(부분)
 
  장필이라는 좁은 창을 통해서만 내다본 당시 서가들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기실 장필의 초서는 도도한 거시적 흐름의 일부였다. 초기의 해진(解縉, 1369~1415)을 필두로 장필이 뒤를 잇고, 중기 이후 축윤명(祝允明, 1461~1527)과 말기의 서위(徐渭, 1521~1593) 등이 배출된 명나라의 서단(書壇)에는 서예가 각자의 개성과 배경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고도 뚜렷한 맥락이 존재했다. 명대(明代)는 초서의 혁명기였다. 역사상 초서의 첫 혁명은 당나라 때 발생했다. 장욱(張旭)이나 회소(懷素)의 ‘광초(狂草)’가 그것이다. 그러나 왕희지나 손과정(孫過庭) 류의 정통적 초서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딘 광초조차 명대의 초서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해 보인다. 명대 초서의 조형미는 지극히 파괴적이다. 회전 운동과 특정 획의 강조라는 붓놀림의 재미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가 균제미를 완전히 상실한 해진의 예를 보자. 
 

 ▲해진(解縉), 〈초서 최각 시축(草書崔珏詩軸)〉(부분), 248×73cm, 개인 소장
 
  당시(唐詩)(최각崔珏의 〈악양루만망(岳陽樓晩望)〉과 〈화인청가(和人聽歌)〉)를 특유의 초서로 휘두른 한 작품이 있다. 여기에서 ‘소(騷)’와 ‘제(帝)’가 해진 글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소(騷). (왼쪽) 손과정(孫過庭) 〈서보(書譜)〉, (오른쪽) 해진(解縉) 초서 최각 시축(草書崔珏詩軸)〉중에서
 

▲제(帝). (왼쪽 2개) 왕희지(王羲之) 〈십칠첩(十七帖)〉, (오른쪽) 해진(解縉) 초서 최각 시축(草書崔珏詩軸)〉중에서


  손과정 〈서보(書譜)〉나 왕희지 〈십칠첩(十七帖)〉의 해당 글자와 비교해 보면, 해진의 글씨는 극단적 변태의 모습을 보임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글씨는 종래의 초서가 지녔던 최소한의 기능적 요소조차 던져버리고, 오로지 조형미만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문자로서의 정체성마저 탈각해 버렸다.
 

▲축윤명祝允明 〈초서 전후 적벽부권(草書前後赤壁賦卷)〉(부분), 31.1×1001.7cm, 상하이박물관(上海博物館) 소장
 
축윤명의 글씨에서는 반대의 극단을 볼 수 있다. 그의 〈초서 전후 적벽부권(草書前後赤壁賦卷)〉 중 세 글자를 보자.
 

▲축윤명 〈초서 전후 적벽부권〉중 ‘하강류(下江流)’
 
  ‘후적벽부’의 한 구절인 ‘하강류(下江流)’에 해당하는 이 13개 점적(點滴)은 마치 바닥에 흩뿌린 강낭콩이나 해질녘 어스름 가로등 아래 모여든 하루살이 떼처럼 보일 지경이다. 기나긴 한자 손글씨의 역사는 명대에 이르러 그 발전의 극에 다다라 이윽고 해체의 신세계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아계 이산해의 〈제관악산인정각시권〉 글씨가 지닌 조형미는 양가적이다. 
 
  이 작품의 전면을 관통하는 동세는 각 글자의 기우뚱한 체세(體勢)다. 보통 ‘의측(欹側)’이라 부른 이러한 기우뚱함 내지 삐딱함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좌하에서 우상으로 그어 올리는 획의 일관된 움직임이 주는 느낌은, 탈규칙의 비뚤음보다는 활달한 자유로움 쪽이 더 크다. 이런 동세는 분명 일탈에 해당한다. 오른손으로 붓을 잡고 쓰는 붓글씨 횡획의 동세는 기본적으로 우상향이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기준에서 벗어난 미감을 주기 때문이다. 아계 이산해 행초서의 기울기는 분명 정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는 장필의 영향을 받은 동시대 행초서와 일맥상통하는 면에 해당한다.

글씨의 지나친 기울기는 보는 이에게 몇 가지 재미를 선사한다. 우선 글자 짜임새의 좌편 치중을 들 수 있다. ‘벽(癖)’에서 ‘疒’과 ‘𡰪’이 이루는 왼쪽 편(偏)은 ‘辛’의 오른쪽 방(旁)에 비해 현저히 크다. ‘발(髮)’도 ‘長’이 큰 공간을 차지하여 불균형의 재미를 준다. (’발’ 아래 ‘노(老)’도 마찬가지다) 
 

▲이산해 〈제관악산인정각시권〉 중에서. (왼쪽) 벽(癖), (오른쪽) 발(髮)
 
둘째, 필요 이상으로 길고 강하게 왼쪽 아래로 내린 사선의 존재다. 본문 첫 행의 ‘石罷垂’에서 줄줄이 등장하는 이러한 획들은 이후로도 무수히 등장하며 의측의 파격으로 작품을 도배한다.
 

▲이산해 〈제관악산인정각시권〉 중에서. ‘석파수(石罷垂)’
 
이러한 좌하로 내린 획의 급한 물매는 또 다른 조형적 부산물도 낳았다. ‘도(道)’의 2번째 점에서 3번째 긴 획으로 넘어가는 부분과 ‘물(勿)’의 첫 획에서 두 번째 획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가느다란 허획(虛畫)이 그것이다. 글자를 구성하는 실획(實畫)이 아닌 이 가는 획들은, 동세의 일관성과 다음 획의 급격한 기울기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는 활달한 붓놀림과 획의 급한 기울기가 낳은 부수적 멋이다.
 

▲이산해 〈제관악산인정각시권〉 중에서. (왼쪽) 도(道), (오른쪽) 물(勿)
 
  급한 기울기의 파격만 존재했다면, 그의 글씨는 도도한 흐름의 한 지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적인 품위와 개성을 품고 있었기에 이산해의 글씨는 일개 아류를 넘어설 수 있었다. 속도와 동세를 중시했지만, 그 추구는 지나친 생략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적절한 수준에 멈추어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행초서는 왕희지 류 정통 초서와 장필 류 파격 초서 사이에서 절묘한 평균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그의 획은 무척 명료하여 보는 이에게 산뜻한 맛을 준다. 이것이 해진이나 장필의 글씨와 다른 결정적 차이다. 자유롭긴 하지만 다소 어지러운 느낌을 주는 장필의 초서와 달리, 이산해의 초서는 활달하여 툭 트여 있으면서도 굵기의 변화가 어느 정도 일정하여 자유로운 가운데 정돈된 느낌을 준다. 파격을 추구하되 선을 넘지 않는다. 이러한 중도의 감각이야말로 이산해 행초서의 진수에 해당한다. 평생 성리의 도학에 매진한 조선 사대부의 내면의 힘이 곧 이런 경지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리라.
 
  노거사의 백발은 노량의 한강수와 더불어 영원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머리카락처럼 가는 저 허획에 그가 노닌 사문의 철선(鐵線)이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 문헌:
『조선중기서예』(예술의전당, 1993)(예술의전당 1993년 ‘조선중기서예전’ 도록), pp.58~60, 74~77
이완우, 「아계 이산해의 서풍(書風)」, 『아계 이산해의 학문과 사상』(이성무 외, 지식산업사, 2010)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86 지정편)』(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8)(보물 50. 충재권벌종손가소장유묵, 보물 제902호)
 

 

 

글쓴이   :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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