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어떤 문헌이나 문화재를 접하다 보면 왕왕 임진왜란을 떠 올리게 된다. 그 때 불타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임진년(1592) 음력 7월 30일, 상주와 함창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벌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남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이 일기를 따라 읽다 보면 420년 전의 일이 어제 일처럼 느껴지고 다시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시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여러 임란 관련 공사(公私)의 기록을 살펴보면 갑자기 큰 부대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대개 자연 발생적인 개인이나 소부대를 이루다가 조금 규모를 갖춘 작은 의병부대를 이루고 이어 연합부대를 형성하고 다시 관군과 연합하거나 관군에 편제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 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일신의 생존을 넘어 지역 사회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선비들의 탄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일(李鎰)의 패전 이후 왜적의 중요 거점이 된 상주 일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의병 조직이 다소 늦었는데, 조정의 이 일기보다 보름 정도 뒤인 8월 16일에 그의 아우 조익(趙翊)이 쓴 일기에도 ‘우선 그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만분의 일이나마 국은에 보답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姑爲其所及爲者爲之, 亦足爲萬一報效之道耶.]’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검간의 행장(行狀)에서도 이광정(李光庭)이 이러한 정신 자세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검간의 일기 행간에 담겨 있는 우국의 마음을 살펴보면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姑爲其所可爲]’는 정신은 환란에 대처하는 당시 선비들의 슬로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수없는 환란을 겪어 엄청난 문헌 자료와 문화재가 침탈, 반출, 소실되었기도 했지만 사실 또 평생 공부해도 한 번 들추어보거나 접해보지도 못할 만큼 많은 문헌자료와 문화재가 있기도 하다. 김택영(金澤榮)이 쓴 《숭양기구전(嵩陽耆舊傳)》이라든가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逸士遺事)》 같은 책을 보면, 이 분들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또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걱정과 고심을 하였는지 알게 된다. 김택영은 자신의 고향인 개성에 대해 무한한 애향 의식을 느끼고 그 곳 출신 인사들에 관한 전기를 남기고 싶었고, 장지연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이전 세대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여항인이나 여류 인사들의 전을 많이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만주로 건너 간 인사들의 일기에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고심혈통(苦心血痛)에 찬 이야기를 남기려는 의식이 보인다.
조정이 남긴 《진사일록》은 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그 경험을 후세에 전하려는 기록 정신이 글의 이면에 담겨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분이 할 수 있었던 것 중에 가장 큰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고려 말기에 문명(文名)을 떨쳤던 이제현(李齊賢)의 《고려사(高麗史)》 졸기(卒記)3)를 보면, “남에게 작은 선행이나 칭찬거리가 있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선배들이 남긴 사적은 비록 작은 일이라도 자기가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人有片善稱譽, 惟恐不聞, 先輩遺事, 雖細以爲難及.]”라는 사관의 평이 나온다.
이제현이 남긴 《역옹패설(櫟翁稗說)》이나 문집에는 인물평이나 전기류에 관한 글이 많고 또 말년에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국사(國史)》를 편찬하여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가 고려사를 편찬할 때 대부분 수용되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사관은 이제현이 역사를 기술하는 자세와 정신의 원천을 살펴본 것이 아닐까.
요즘은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아직 여건이나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또 선배나 남에 대해서는 정당한 칭찬 거리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점을 먼저 부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보다는 자기의 일신을 앞세우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라고 한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과 같은 군자다운 마음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환의식이 현저하게 줄어든 요즈음에 검간 조정의 말은 더욱 의미 있게 들린다. 앞서 살다간 분들의 언행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다.
1) 漆室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칠실이란 읍(邑)에 살았던 처녀를 말한다. 그 칠실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임금은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가 할 근심인데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 하였다. 《列女傳 卷3 漆室女》 이를 흔히 칠실우(漆室憂)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국사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낼 때 겸사로 많이 쓰인다. 2) 원제는 《일기 상(日記上)》으로 되어 있다. 3) 졸기(卒記) : 졸(卒)은 대부(大夫)나 대부로 대접할 만한 분의 죽음을 말하고 기(記)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인물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에 이어 사관의 평이 붙어 있는데 이를 졸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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