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거사비(去思碑)

백광욱 2017. 6. 27. 07:19

 

 

길가의 거사비에 대해 짓다[題路傍去思碑]

 

거사비 세운다고 마구 돈을 거둬 가니
떠돌고 도망간 백성들 누가 그리 만들었나
빗돌은 말없이 길가에 버티고 섰는데
신관은 어찌 그리 구관 닮아 어질던지

 

去思橫斂刻碑錢거사횡렴각비전
編戶流亡孰使然편호류망숙사연
片石無言當路立편석무언당로립
新官何似舊官賢신관하사구관현

- 이상적(李尙迪 1803~1865), 『은송당집(恩誦堂集)』 권8

해설
   거사비는, 지방 고을을 다스리던 수령이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가 재임했을 때의 공덕을 기리어 떠난 뒤에도 잊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세우는 비석이다. 송덕비(頌德碑),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 영사불망비(永思不忘碑), 유애비(遺愛碑), 생사당(生祠堂) 등도 수령의 선정(善政)과 관련된 흔적이다. 따라서 지방관이 되어 백성들에게 얼마나 은택을 베풀었는가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므로 관료의 묘도문자에는 부임하는 곳마다 거사비가 세워졌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본래 백성들이 구관을 잊지 못해 자발적으로 세운다는 훈훈한 취지에서 시작된 이 일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의미가 변질되었고, 나중에는 지방 유지에 해당하는 향임(鄕任)과 아전이 주체가 되어 백성들에게 강제적으로 재물을 징수하는 착취수단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결국 영조 연간에 어사 박문수의 장계로 인해 거사비를 금지하기까지 하였으며, 정조 때에도 이 금령을 거듭 밝혀서 영조 20년(1744) 이후에 세운 거사비는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고 국가에서 명나라 장수들을 위해 세운 거사비를 제외하고 민간에서 사사로이 비를 세우는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관리를 엄벌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금령이 있어도 풍습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이상적이 이 시를 지은 때가 철종 12년(1861)이었으니, 정조 이래로 금지되었던 거사비를 세우는 일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적은 짧은 시에서 당시의 이러한 폐단을 그대로 적시하였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굶주림과 학정을 피해 유망하게 만들었는데도 거사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다시 돈을 뜯어가는 상황이다. 게다가 신임 수령 역시 옛 수령을 그대로 닮아 기대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더 기가 막힌 현실인데, 이를 두고 어질다[賢]고 표현해서 시적인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다.

 

   이상적은 순조 때부터 고종 초까지 12차례나 중국을 왕복한 역관(譯官)이자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문인(門人)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홍세태(洪世泰), 이언진(李彦瑱), 정지윤(鄭芝潤) 등과 함께 역관사가(譯官四家)로 불렸다. 헌종이 일찍이 그의 시를 애송하였기에 은송당(恩誦堂)이란 이름을 문집에 붙였다고 한다. 위의 시는 급변하는 세태를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중인 지식층으로서 당시의 부패한 관료와 암담한 민생을 고발한 일종의 사회비판적 시라고 할 수 있다.

 

글쓴이김성애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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