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과 자기 수행
“근심 가운데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가운데에 근심이 있었네. 조화를 타고 일생을 마치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하리오?[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스스로 지은 묘갈명(墓碣銘)의 마지막 구절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하 번역원)의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고전산문)’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만난 이 구절은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스로를 잊고 음양의 조화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세계와 삶에 대한 철학이 읽힌다. 퇴계 선생 일생의 공부와 몸과 마음의 수행은 어떻게 연결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면서 늘 아쉬웠던 생각이 뒤따라온다.
번역원이 다루는 우리 고전은 거의 유교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의 유교는 대중들에게 어떤가. 유교는 우리가 구한말 일제에 강점당하게 한 ‘원흉’ 취급부터, 서구 민주주의의 시민의식과 배치돼 근대화의 지체 원인으로 배제해야 할 대상처럼 돼버렸다. 툭하면 각종 사회 부조리의 뿌리로, 정치·사회의 후진성과 경제의 비효율도 유교 탓을 한다. 이 점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나아진 게 없다. 우리 정신의 자산(資産)인 고전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면 ‘역사적’ 유교에 대한 인식 변화가 우선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에 이황직 숙명여대 교수가 펴낸 『군자들의 행진』은 유교에 덧씌워진 이런 오명 중 몇 가지를 뒤늦게 바로잡아 보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유교인들이 독립과 건국 과정에 여타 정치·종교 세력 못지않게 힘을 보탰으며, 이런 흐름 속에 4·19혁명을 완결하는 4·25 교수단 데모의 중심에 있었다는 걸 여러 자료를 찾아 처음으로 정리했다. 4·19 당시 교수와 시위 학생들의 요구와 행동 속에 정치와 사회를 도덕적·법률적 명칭에 상응하게 바로잡는, 곧 정명(正名)의 유교 원리가 작동했다는 것을 되레 외국 관찰자들이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우리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내용이다.
‘역사적’ 유교와 깊은 철학적 세계관을 담은 학문으로써의 유교, 혹은 오랜 전통의 ‘자기 수행’ 방법론으로써의 유교는 분명 달리 접근해야 하는데, 대중들은 이를 구분해 이해하지 못한다. 국내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신자유주의의 돌풍 속에 몸과 마음이 소진된 대중들이 ‘자기 수행’을 목마르게 찾지만, 누구도 유교에서 방법을 구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유교의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필자의 능력 밖의 얘기지만, ‘자기 수행’으로써의 유교에 주목한다면 무언가 현대적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해 말 발표된 통계청의 종교 인구 조사를 보면 국내의 종교를 가진 인구는 2015년 43.9%로, 처음 증가세가 꺾여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본격적인 ‘탈종교 사회’의 진입이라고 말하지만, 제도화·세속화·권력화해버린 거대 주류 종교들에 대중들이 질리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있다. 적지 않은 대중들은 제도 종교 밖에서 다양한 ‘수행’을 찾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유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분야 연구자들이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유교가 기존의 주류 종교처럼 교단이나 일상적 종교 행위가 있지는 않지만, 천명을 따르고 본성을 실천하는 수양(修養)이라는 심신을 닦는 내면적 수행법이 있다. 유교에선 수양, 도교에선 수련, 불교에선 수행이란 용어가 주로 사용돼 왔다. 수양이 사회적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강조된다면, 수련은 양생의 목적이 부각됐고, 수행은 초월적인, 존재론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 의미를 세세히 따지자면 복잡하고, 근래에 이 세 의미를 포함해 수행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만큼 여기서는 수행이란 용어를 써보자.
2014년에 최석기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가 펴낸 『조선 선비의 마음공부, 정좌(靜坐)』는 이 점에서 많은 시사를 준다. 한 구절을 보자. "이황은 정좌가 자칫 불교의 선처럼 주정(主靜)으로 흐를까를 염려하여 정이(程頤)가 정(靜)자 대신 경(敬)자를 쓴 것에 그 변별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정좌가 불교의 선정처럼 되면 적멸로 흐르게 되기 때문에 이황도 이 점을 주의한 것이다."(37∼38p) 불교의 선(禪)과 차별화된 유교의 수행 체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최 교수의 의문도 필자와 같이 시작됐다. 유교의 수행법을 찾다가 번역원의 ‘고전종합DB’를 검색했더니, 자료가 매우 많은 것에 놀라 책으로 쓰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단적으로,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수행서로써 현대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사회적 삶과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의 수행은 고전공부와 연결돼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어찌 보면 더 현대적일 수 있다. 유교에는 기존 종교의 단점인 배타성이 없어 수행법이 현대적으로 개발된다면 거부감이 적다. 세계적으로 한국이 비교적 종교 갈등이 적은 것은 기독교도건 불교도건 무슨 종교를 가졌건, 한국인의 바탕에 유교적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이란 가설도 있지 않은가.
유교가 스스로 길을 찾지 않으면 버려야 할 유산처럼 돼버린 지금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이대로 가면 우리의 많은 고전이 그저 학자들 간에 학술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중들의 정신적 자산으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번역원은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 등 다양한 고전의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늘 관심 있게 보고 스크랩하는데, 어떤 글은 마음뿐 아니라 몸에까지 뭔가 ‘곧게’ 영향을 주는 느낌을 받곤 했다. 주제에 넘게 고전의 대중화와 요사이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수행을 연결지어본 것은 바로 그런 경험 때문이다. 그러면서 좀 더 많은 국민이, 특히 젊은이들이 우리 고전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번역원만의 노력으로 힘겹겠지만, 번역과 대중화 사업에서 이런 점을 검토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쓴이엄주엽
문화일보 문화부 선임기자
학술, 종교 분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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