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를 그리며
너는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그리운 북쪽 바닷가
깊은 가을 하얀 이슬에 연꽃이 지고
연희의 동산에 단풍이 붉게 물들었네
천만 개 나뭇가지 하늘을 벌겋게 밝히고
비단 장막 펼쳐 놓으니 그 빛깔 영롱하였네
연희는 단풍 아래서 달 뜨길 기다리고
달빛은 금(琴)을 뜯는 연희를 비추었네
이 무렵 나는 함께 차디찬 강가로 가
쌓인 낙엽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연희 손을 잡고
붉게 물든 동산을 함께 거닐었네
問汝何所思문여하소사
所思北海湄소사북해미
高秋露白芙蓉落고추로백부용락
蓮姬園裏楓樹赤연희원리풍수적
千條萬條燭天紅천조만조촉천홍
錦步障開光玲瓏금보장개광영롱
蓮姬待月楓樹下연희대월풍수하
月照蓮姬撫孤桐월조연희무고동
是時我從寒江渚시시아종한강저
坐着葉堆相與語좌착엽퇴상여어
語罷却携蓮姬手어파각휴연희수
紅樹園中共來去홍수원중공래거
- 김려(金鑢, 1766~1821) 『담정유고(藫庭遺藁)』, 권5, 「사유악부(思牖樂府)」 중
해설 |
연희는 김려가 부령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기생이다. 처음 김려가 부령에 도착했을 때 연희는 낯선 환경과 척박한 인심에 힘겨워하는 그를 곁에서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철마다 의복을 지었으며 부모님의 제사상을 차려 주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연희는 문학과 인물에 대해 김려와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고 여러 방면에서 김려에게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평범한 기생 이상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녀에게 김려가 사랑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려는 연희의 모범적인 언행들을 정리하여 『연희언행록』이란 책을 만들 정도로 그녀를 존중하고 아꼈다. 그런데 진해로 이배되며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무척 상심이 컸으리라. 진해에 도착한 김려는 매일 북쪽을 바라보며 그녀와의 추억에 잠겼다. 연희와의 첫 만남, 그녀의 생김새, 그녀의 집 위치를 비롯해 그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떠올리며 「사유악부」 곳곳에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위 시는 그중의 한 수이다.
단풍이 붉게 물든 어느 가을날 밤, 달빛이 비추는 가운데 연희는 김려를 위해 거문고를 연주한다. 그러다 두 사람은 함께 강가로 가 쌓인 낙엽 위에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이야기가 끝나면 다정히 손을 맞잡고 단풍 붉은 동산을 정답게 거닌다. 연희와 함께한 그날 밤을 마치 멜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그려 내었다.
귀양 온 선비와 기생의 사랑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우리가 흔히 봐 왔던 다른 한시에 비해 저급하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진솔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언어로 표출한 것이 시라면 김려의 사랑 노래만큼 시다운 시가 있을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연희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만 같다.
「사유악부」에는 애틋함을 넘어 애절함까지 느껴지는 시가 많다. 지면상 다 소개하지 못하고, 다음 한 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너는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問汝何所思(문여하소사)
그리운 북쪽 바닷가/ 所思北海湄(소사북해미)
괴상타 오늘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恠底今宵夢兆異(괴저금소몽조이)
연희가 내 손 잡고 펑펑 울면서/ 蓮姬握手橫涕泗(연희악수횡체사)
일변 오열하고 일변 말하기를/ 一回嗚咽一回言(일회오인일회언)
서방님 진해로 이배된 뒤에/ 阿郞被逮出城門(아랑피체출성문)
우물가 앵두와 살구나무가/ 井上櫻桃與丹杏(정상앵도여단행)
일시에 마르고 벌레가 뿌리를 파먹었는데/ 一時並殭虫齧根(일시병강충설근)
올 가을이 되자 문득 이파리 돋아/ 彊到今秋忽生葉(강도금추홀생엽)
잎마다 손바닥만 하고 가지마다 무성해졌네요/ 葉葉如掌枝枝疊(엽엽여장지지첩)
서방님도 이 나무처럼 어서 빨리 돌아와/ 願郞如樹早回還(원랑여수조회환)
이승에서 다시 만나 함께 즐거움을 누리소서/ 此生重逢共歡悏(차생중봉공환협)
글쓴이김준섭(金俊燮)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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