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저택(破家瀦澤)과 연좌죄
번역문 |
우리나라의 경우 전란(戰亂) 이전에 이를 따라 아비를 죽인 집에만 이 법을 시행하였는데, 그 당시 영중추부사 신(臣) 윤승훈(尹承勳)이 그 내력을 상세히 기억하여 분명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 신 또한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전란 후에 상신(相臣) 유영경(柳永慶)이 남편을 죽인 자에게도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창하였고, 한때 대신(大臣)들도 ‘삼강(三綱)은 하나’라고 논의하여, 마침내 남편을 시해한 자의 집에도 파가저택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대체로 지금 이 파가저택의 법을 우리나라에서 취하여 근거로 삼아 시행하는 것은 다만 주 정공의 논(論)에 의거한 것이요, 다른 경(經)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별도로 의견을 내세워 가지 위에 가지를 더 만들어서 행해지지 않은 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파가저택 이 한 조항은 신이 항상 불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문 |
- 『광해군일기 3년 9월 20일』
해설 |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파가저택이 시행되었으나 적법성 여부와 관련하여 찬반의 논의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백사의 지적처럼 파가저택의 근거를 형서에서 찾기 힘드니 그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 이를 확대 적용하여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경우에까지 시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등을 내세우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처형만으로는 대악(大惡)에 대한 형벌로 부족하며 ‘고려의 고사(故事)’, ‘전조(前朝)의 고사(故事)’, ‘구례(舊例)’ 혹은 ‘죄가 극악하면 목을 베고 가족을 멸하고 그 집은 웅덩이를 판다.’라는 『당률(唐律)』 십악(十惡) 조를 근거로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백성이 수령을 능범한 죄인에 대해 파가저택해왔고, (『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부터 행해오던 이러한 규례를 따르다가, 중종 36년에 이르러 항법(恒法)으로 정해진 듯하다. (『중종실록 36년 6월 21일』)
그 이후 강상죄인에 대해 처자를 노비로 삼고[妻子爲奴], 가산을 적몰하고[籍沒家産], 파가저택하고, 수령을 파직하고[罷其守令], 읍호를 강등시키는 일[降其邑號]을 해사(該司)가 승전(承傳)을 받들어 거행하는 형식으로 법제화 과정을 밟아갔다. (『승정원일기 숙종 13년 4월 25일』)
파가저택은 중국에서도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거나 자식이 아비를 시해한 경우에만 적용되었고 『대명률(大明律)』에도 관련 법규가 없으나, 조선에서는 『속대전』 형전 추단(推斷) 조에 정식 율문으로 실리면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역모와 강상범죄에 대한 연좌율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 강상죄인[부(父)·모(母)·부(夫)를 시해하거나, 노(奴)로서 주인을 시해하거나, 관노(官奴)로서 관장(官長)을 시해한 자]은 결안(結案)하여 처형한 뒤에 아내, 아들, 딸은 노(奴)로 삼고, 파가저택하며, 그 읍(邑)의 호(號)를 강등하고, 수령은 파직한다.[綱常罪人[弑父·母·夫, 奴弑主, 官奴弑官長者]結案正法後, 妻·子·女爲奴, 破家瀦澤, 降其邑號, 罷其守令.] ○ 반역(反逆)의 연좌는 본율(本律)이 있으며 파가(破家) 이하는 이 율을 쓴다.[反逆緣坐, 自有本律, 破家以下用此律.] |
파가저택이 적용되는 대상은 주로 모반 대역 부도 죄인이며,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훼손한 전패작변(殿牌作變) 죄인, 시부(弑父)·시모(弑母)의 패륜죄인, 수령 등 상급 관리를 범하거나 모욕한 죄인 등이고, 남편을 죽인 아내 역시 강상죄인으로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파가저택은 일단 해당 죄인이 주거하던 곳이어야 한다. 죄인이 살던 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면 파가저택할 수 없었다. 즉 아버지의 집에서 살았다면 아버지의 집을 파가저택할 수 없었고, 또 죄인이 양반호의 솔하(率下)로 한성부 안에 살고 있거나 양반의 낭하(廊下)에서 거접(居接)하고 있었다면 이 역시 파가저택 할 수 없었다. 만약 떠돌이로 살다가 역적이 되었다면 보통 역적들이 모사를 한 그 장소가 대상이 되었고, 범위를 주동자에 한정하여 역적 수범(首犯)의 집만 파가저택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7월 25일』) 특히 역모죄로 처형된 양반가 집의 기와나 목재는 양도 많고 질도 좋아서 관아 건물, 고사(庫舍), 궁궐 수리 등에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각 아문에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일도 있었다. 또 역적의 집을 방매하여 얻은 돈을 나라 경비에 보태거나 객사(客使) 행차에 쓰기도 하였다.
파가저택의 목적은 죄인의 흉악한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율에 없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역시 율에 없는 법으로 다스려야 하며, 그 더러운 자취를 없애기 위해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것이다.(『중종실록 34년 5월 16일』)
간원이 아뢰기를, “……저와 같이 파가 저택을 하여 일찍이 살던 곳까지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엄하게 제거하고 끝까지 다스려서, 천지간에 용납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 매우 깊고 절실하니, 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諫院啓曰: “……彼破家瀦宅, 倂與所嘗居而盡滅之者, 痛絶極治, 不容天地之意, 至深至切, 又何加乎?”] (『중종실록 38년 4월 15일』) |
보통 죄인의 가족에 대한 연좌율로써 전가사변(全家徙邊), 즉 죄인을 포함한 가족 전체를 북쪽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이 있었으나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많았고, 또 변방의 경계가 안정되어 가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까지 시행되었던 파가저택은 연좌율이라는 점에서 전가사변과 유사하나 실은 이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죄인을 포함 가족 전체를 이주시키는 전사사변에 비하여 파가저택은 처형된 죄인, 그리고 남은 죄인 가족들의 생활 터전, 혈연적 근거를 없애 결국 가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천주교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의 파가저택터
현재 유항검의 파가저택터가 남아 있으나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대부분의 파가저택터는 법 집행자들이 의도한 대로, 파가저택의 원취지처럼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가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희망이다.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결국 가족의 힘으로 견디고 이겨나가지 않는가. 그러한 가족을 흔적도 없이 해체시켜버리는 것이 파가저택이다. 보통 거열이나 부관참시, 압슬형, 주뢰형 등의 신체형이 조선시대 혹형(酷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반 대역죄인, 강상죄인의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어 흩어지게 하고, 함께 살아갈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은 파가저택, 이 역시 참으로 가혹한 형벌인 듯싶다.
글쓴이조윤선(趙允旋)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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