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기억
번역문 |
상이 이르기를,
“중봉 조헌에게 자손이 있는가?“
하니, 정언섭이 아뢰기를,
“충신, 현인, 절의를 지킨 사람들의 자손들은 예로부터 번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문열공 조헌의 아들 중 한 명은 함께 순절하였고, 그 후손 중에 조광한이라는 사람이 선대 조정에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그 자손들이 옥천에 살고 있었는데 생계를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신축년과 임인년에는 거의 구걸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생존한 사람들이 적자인지 서자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관례를 치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중 14, 5세 정도 되는 자가 지금 봉조하 민진원에게 학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 자손들이 아직 유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충청도 감영에게 조헌의 자손을 찾게 하여 적자든 서자든 자리가 나는 대로 특별히 등용하고 보고할 때 조헌의 자손이라는 주를 달도록 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원문 |
上曰: “趙重峯憲, 有子孫耶?” 彦燮曰: “忠賢節義人子孫, 從古例多不振, 誠可嗟愍. 文烈一子則同時殉節, 其後有趙匡漢者, 先朝除職, 而匡漢已死. 其子孫, 在於沃川地, 貧不能自保, 辛·壬兩年, 幾至丐乞. 而卽今見在者, 未知嫡庶何居, 亦未知勝冠者幾人. 而其中年可十四五者, 方受學於閔奉朝賀家矣.” 上曰: “然則可知其子孫之猶能爲儒業矣. 分付銓曹, 令本道訪問其子孫, 勿論嫡派與支孫, 各別隨窠錄用, 而懸註以入, 可也.”
-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6월 18일
해설 |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조선 중기의 선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를 결성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충청도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헌의 문인들이 조헌과 700 의병의 유골을 모아 무덤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워 그들의 순절을 기렸다. 조정에서도 그를 공신에 녹훈하고 이조 참판에 추증하여 그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조헌의 이름과 생애는 기록으로 남아 오래도록 회자되었지만, 그의 자손들은 몰락하여 빈곤에 시달렸고, 어디에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도 조정의 회의 자리에서 우연히 조헌의 이름이 언급된 덕에 다시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랐고, 영조의 명으로 제자리를 찾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특별한 죽음을 기억한다.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 혹은 나라가 지키지 못해 죽어간 사람들을 기록하고 표현하고 추모한다. 사람은 떠나도 기억은 남아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기억은 권력의 필요에 의해 실제보다 더 극적이고 과장된 모습으로 어색한 화장을 한 채 강요되기도 하고, 반대로 억눌리고 왜곡된 형태로만 떠돌기도 한다. 그러다 진보하는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진 기억의 적나라한 민낯을 폭로하기도 하고, 묻혀있던 기억을 어렵게 발굴하여 재조명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기억의 작업들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언론은 때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외롭고 고된 삶을 다룬다. 이들의 삶은 친일부역자 조상이 남긴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되어 분노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나라가 나서서 해결하기를 촉구하지만,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의연하다. 그들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보다 선조의 특별한 삶과 죽음이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 기억으로 풍족해진다. 반대로 친일부역자의 후손들은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고 노력한다. 그들 역시 기억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기억이 그들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조선은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했다. 위의 기사에서 조헌 후손들의 현황을 보고했던 정언섭은 몇 년 뒤 동래 부사로 부임한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동래는 송상현이 전사한 곳입니다. 동래 부사 정언섭이 성을 쌓다가 유골을 발견했는데 옆에 갑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전사자의 유골이기에 경상 감사와 상의하여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하였다. 顯命曰: “東萊卽宋象賢戰亡之地. 而東萊府使鄭彦燮, 築城時得枯骨, 則甲冑在傍, 明是戰亡將士之骨, 故彦燮與道臣相議, 掩葬立碑云矣.” (『승정원일기』 영조 16년 7월 14일) |
정언섭은 유골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고 직접 비문을 써서 비석을 세웠다. 보고를 받은 영조는 무덤과 비석을 보강하라고 명했다. 뒤를 이은 정조는 충무공 이순신의 글과 관련 기록을 모아 문집을 편찬하였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는 왜군과 싸우다 죽어간 많은 백성의 이름이 남아 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이 기억들을 공유한다. 개인의 비극으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많은 죽음이 모두의 기억이 되어 오래도록 전해졌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1980년 5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러나 국가라는 이름의 독재 권력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그리고 올해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철저한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그것은 올바르게 기억하겠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울먹이며 편지를 낭독한 유가족에게 다가가 말없이 안아준 행동에서 사람들은 선언의 진정성과 이행의 의지를 확인하고 감동했다. 약속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이 결정적 장면 또한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되어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죽은 사람, 죽인 사람, 살아남은 사람 모두 마땅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바라건, 바라지 않건.
글쓴이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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