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봄 강물을 짜는 꾀꼬리

백광욱 2013. 5. 16. 08:58

봄 강물을 짜는 꾀꼬리

 

봄 강물을 짜는 꾀꼬리

가인이 꽃그늘서 부는 구성진 생황 소리요
시인이 술동이 앞에 놓은 한 쌍의 귤이라고나 할까
냇가의 버드나무에 황금 북이 분분히 오가며
안개와 봄비로 봄 강의 물결을 짜는구나

佳人花底簧千舌
韻士樽前柑一雙
歷亂金梭楊柳崖
惹烟和雨織春江

- 김홍도(金弘道, 1745~1806)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
 


  어느새 봄날이 또 가고 있다. 봄은 왔지만 봄이 온 것 같지 않다[春來不似春]고 떠들든 게 엊그제고, 봄 도성에 꽃잎 날리지 않는 곳이 없던[春城無處不飛花] 때가 또 어제와 같은데, 어느새 녹음과 방초가 꽃보다 좋은 계절[綠陰芳草勝花時]이다.

  지난 주말과 일요일은 참으로 날씨가 좋았다. 아무리 바쁜 사람도, 아무리 어려움에 처한 사람도, 잠시 동안이나마 날씨로부터 마음의 위안과 평온을 선사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좋은 날씨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은 참으로 인생을 헛사는 것으로 생각되어, 필자 역시 인근의 왕릉에 가서 자리를 깔고 누워 소나무 사이로 하늘을 보았다.

  그림 에세이집을 꺼내 읽다가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를 마주하게 되었다. 동자를 대동한 갓을 쓴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버드나무에서 울고 있는 꾀꼬리를 올려다보는 유명한 그림이다. 계절적으로 딱 이 시기의 풍경이고 화제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 감상의 묘미를 더해 주었다. 위에 인용한 한시이다.

  화제의 출처는 어디일까? 집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며 자료를 찾아보았다.

  어떤 분들은 이 시를 단원이 썼다고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단원의 친구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썼다고도 하며, 또 중국의 어느 시를 인용한 것이거나 구절을 여기저기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인문은 김홍도의 절친한 벗으로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는 대작을 남긴 화가인데, 김홍도의 여러 그림에 관화기(觀畵記)를 썼다. 말하자면 그 그림을 자신이 보았다는 기록을 남겨 김홍도의 진품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도 ‘바둑 두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오래 묵은 소나무가 있는 집에 사는 도인[碁聲流水古松館道人]’이라는 긴 호를 쓴 다음, ‘이 문욱(문욱은 이인문의 자)이 증명함[李文郁 證]’이라는 관화기가 붙어 있으니, 이인문이 이 제화시를 ‘지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특히 이 관화기까지 포함해서 제화시 전체가 단원의 필체이다.

  이 시에 대한 단서는 아쉬운 대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와 간찰 투식집 『한훤차록(寒暄箚錄)』에 보인다. 경연에서 『시경』 「패풍(邶風)」을 공부할 때, 이동직(李東稷)이 정조에게 아뢴 말이다.

새들 가운데 모습이 아름답고 소리가 곱기로는 꾀꼬리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인(唐人 : 중국인)들은 시에서 색(色)을 찬미하는 경우에는 ‘금북이 버들 실을 짠다. [金梭織柳]’라고 하고, 소리를 칭찬할 경우에는 ‘생황이나 거문고, 비파가 울리는 것 같다. [笙簧琴瑟]’라고 하니, 시인이 흥을 일으키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단원의 시 앞 두 구의 실마리가 풀리는 셈이다. 첫 구에서는 꾀꼬리 소리를 꽃그늘에서 미인이 부는 생황 소리에, 두 번째 구절은 꾀꼬리의 매력적인 색감을 시인의 술동이 앞에 놓인 귤에 비유한 것이다. 청각과 시각을 동원하여 꾀꼬리를 묘사하였는데, 첫 구에서는 시각을, 두 번째 구에서는 후각을 함께 자극하는 한편, 두 구 전체에 미인과 시인을 내세워 야릇하면서도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훤차록』에는 입하(立夏) 무렵에 쓰는 편지 투식을 소개하며, “꾀꼬리는 금빛 북이 되어 날아다니며 버들 실을 짠다. [鶯擲金梭織柳絲]”라는 당시(唐詩)를 인용했는데, 이 시의 전체 내용과 작가는 알 수 없다.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는 『사문유취(事文類聚)』 등의 문헌에서 당시라고 언급한 것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구절만으로도 이 제화시의 기본 아이디어가 유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춘광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라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던고

  이 작자 미상의 시조는 앞에서 말한 당시 구절에 맥이 닿아 있고 단원 그림의 제화시와도 기본 아이디어가 같다. 그럼 이 제화시는 누가 지은 것일까? 세 번째 구의 평측이 다소 어지러운 점, 전구에서 결구로 넘어가는 시상의 어색한 비약이라든가 그림과 시가 한 사람 손에서 나온 듯 긴밀하게 짜인 점 등을 볼 때, 단원이 흔히 다른 사람의 시를 제화시로 쓴 것과는 달리 이 시는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제화시를 산문으로 풀면 이쯤 되지 않을까.

  아, 그것참... 소리를 들으면 아름다운 여인이 꽃그늘 아래서 구성지게 생황을 부는 것이라 표현해 보고 싶고, 그 색감을 보면 시인이 술 한 잔 들고 취기 속에 바라보는 노란 귤 같다고 묘사해 보고 싶군그래. 요렇게 귀엽고 독특한 꾀꼬리가 노란 북이 되어 냇가에 선 버드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날며 우는구나. 하늘하늘 늘어진 버들은 날실이고 노란 몸체로 날아다니는 꾀꼬리는 씨실을 넣는 베틀의 북과도 같네. 아, 어느새 버들 실만 짜 놓은 게 아니라, 봄비를 날실로 삼고 안개를 씨실로 삼아 또 비단 같이 고운 봄 강물을 짜 놓았네!

  제화시의 마지막 구절에 안개와 봄비를 가지고 봄 강물을 짰다는 게 이 시의 독특한 발상이다. 시조에서 보이는 시름이 의미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라면 이 강물은 봄에 느끼는 복잡한 정서를 다 담아내고 있어 무한한 감회가 스며들게 해 준다. 범중엄(范仲淹)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의 마지막 구절을 처음에는 “선생의 덕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다. [先生之德, 山高水長.]”라고 하였다가 이관(李觀)의 조언에 따라 ‘덕’을 ‘풍(風)’ 자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사실 옛 시들을 보면 늦봄에 나타나는 정서가 참으로 다양하다. 당나라 시인 유방평(劉方平)의 봄날의 원망[春怨]이라는 시이다.

사창에 해는 져서 점점 황혼이 가까운데      紗窓日落漸黃昏
좋은 집에 눈물 흔적 보아 줄 사람이 없네    金屋無人見淚痕
적막한 빈 뜰 봄은 저물어 가는데               寂寞空庭春欲晩
배꽃이 땅에 가득해도 문을 열지 않네         梨花滿地不開門

  좋은 집에 혼자 있는 여인에게 배꽃이 만개하는 봄이 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밖으로 나가 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은 혼자, 가장 화려할 시절이 가장 아픈 계절이 되고 만다. 내면의 외로움과 슬픔으로 아름다운 봄이 온통 남의 일이다. 봄에 발견하는 또 다른 쓸쓸함의 미학이라고나 할는지. 그런가 하면 진화의 늦봄[春晩]이라는 시는 또 어떤가.

비 온 뒤 정원엔 이끼 소복 돋았는데           雨餘庭院蔟莓苔
인기척 없는 사립문 대낮에도 닫혀 있네      人靜雙扉晝不開
푸른 섬돌 떨어진 꽃 한 치나 쌓였는데        碧砌落花深一寸
봄바람이 불어왔다가 또 불어가네              東風吹去又吹來

  섬돌에 쌓인 꽃을 바람이 오고 가며 쓸고 다녀도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앞 시에 드러난 정조처럼 애절함이 아니라 이 시는 마음의 평화가 느껴지는 한가한 정취가 오롯하다. 앞의 시를 통해 외로운 사람이 위안을 받는다면 이 시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 주고 상처를 치유해 준다. 이제 분위기가 다른 시를 한 번 보자. 영조 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가 1735년에 인왕산 필운대(弼雲臺)에 올라 사도세자가 태어난 기쁨을 노래한 시이다.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시 읊으며 필운대에 오르니  君歌我嘯上雲臺
흰 오얏꽃 붉은 복사꽃 수만 그루에 피었네           李白桃紅萬樹開
이러한 풍광에 이러한 즐거움으로                       如此風光如此樂
해마다 태평의 술잔에 길이 취하였으면                每年長醉太平杯

  전편에 밝은 기운이 넘치고 태평한 시대의 재상다운 여유가 느껴진다. 현실에서 이런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시에서나마 도원경을 향해 마음을 크게 열어 볼 수 있다. 정조는 60년이 지나 세심대(洗心臺)로 바뀐 이곳에 올라 생부를 추억하며 눈물에 젖었다. 시가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특별한 사모의 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유몽영(幽夢影)』의 저자 장조(張潮)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물 중에 하늘에는 달, 악기 중에는 거문고, 동물로는 두견새를 최고로 꼽고, 식물로는 버들만 한 것이 없다. [物之能感人者, 在植物莫如柳.]”라고 했다. 옛 시에 무수히 등장하는 버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월의 풍상을 겪고 버들을 보면 그의 견해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매천 황현은 ‘봄 강의 수면은 실비와 같다. [春江一面如絲雨]’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잔잔한 수면에 연무가 끼고 꾀꼬리는 운다. 연록의 버들 빛도 강물에 비쳤을 테니 그 감회가 오죽하랴.

  신비로운 생황 소리를 닮은 여인의 애틋한 마음도, 술상을 앞에 두고 시큼한 귤 향기를 풍기는 시인의 그리움도, 안개와 봄비 속에 뿌옇게 떠오르는 미련이나 회한도, 한바탕 세월 따라 깊어진 강물 따라 내 마음의 어딘가에 흐르는가. 늦봄의 정서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이 제화시 한 수로 그림의 풍미가 더욱 깊어짐을 느낀다.

 
글쓴이 : 김종태(金鍾泰) / hanaboney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