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손바닥도 마주쳐야

백광욱 2013. 4. 11. 20:35

손바닥도 마주쳐야

손바닥도 마주쳐야
여러 사람의 뜻이 다 모아져야
일을 이룰 수 있으니,
손바닥도 저 혼자서는 소리를 내기 어렵고
반드시 마주칠 동료가 필요한 법이다.

群策咸屈 可底於成功 隻掌難鳴 必俟乎同類
군책함굴 가저어성공 척장난명 필사호동류

- 양경우 (梁慶遇,1568~1629?)
「광한루를 중건하기 위해 경내에 통유한 글[重建廣寒樓通諭境內文]」
『제호집(霽湖集)』권10

 

  
  삼남(三南)의 명소(名所)로 알려진 남원(南原) 땅의 광한루(廣寒樓)는 세종조 초기에 황희(黃喜) 정승이 처음 세웠는데, 이때 이름은 광통루(廣通樓)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몇 차례 중수와 단청을 거쳤고, 1444년(세종 26)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정인지(鄭麟趾)가 이 누각에 올라 경관을 찬탄하며 광한루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26년(인조 4) 남원 부사인 신감(申鑑)이 대대적으로 복원, 중수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위의 글은 조선 중기의 문인 양경우가 1626년 중수할 때 부사 신감을 대신하여 지은 글로, 남원 백성에게 보내는 통유문의 서두에 있는 구절입니다. 글의 내용을 보면,

"아, 대대로 전해온 선현의 유적지가 담이 무너지고 주춧돌은 깨져서 행인들로 하여금 한탄을 자아내게 해서야 되겠는가. 한 자 베, 한 섬 쌀이라도 보태어 다시 전성기의 고사를 회복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호소하고, 이어
 

"병란이 끝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바로 천운이 태평 시대로 돌아서고 재물이 점차 충원되어 재건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유독 이 누각이 복원되지 않는다면 큰 고을로서 정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 고을에 사는 자로서 어찌 마음을 느긋이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늙은 수령 혼자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일을 크게 벌이지 않으니 잠시 일손을 빌리는 것을 어찌 마다하겠으며, 마침 풍년이 들었으니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한다. 각자 금전을 내되, 많고 적음에는 구애받지 마라."

하여,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한편으로는 중수에 협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양경우는 임진왜란 때 25세의 나이로 부친 양대박(梁大樸)을 따라 아우 양형우(梁亨遇)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전공(戰功)이 있습니다. 또한, 전란 중에 군량이 딸리자 곡식을 조달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도내에 돌렸는데, 10일 만에 7천여 석이 모여, 전세를 호전시키는 데에 일조하였다고 합니다. 광한루가 완벽하게 복원된 데에도 이 통유문이 큰 몫을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손바닥 하나만으로 소리를 낼 수 없듯이, 뜻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동심공정(同心共貞)’ 즉, 한마음으로 함께 일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최상의 방도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글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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