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 SNS
숙천제아도서(宿踐諸衙圖序) - 한필교(韓弼敎)
그림은 사물을 본뜬 것이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싣고 있는 것 중 그림으로 그 오묘함을 전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천년 전의 사물과 만리 떨어진 사물을 아직까지 그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으니 생각건대 그림의 도움이 또한 크도다.
畵者所以象物也. 天之所覆、地之所載, 莫不以畵傳其妙, 故千載之久、萬里之遠, 尙能有想得其髣髴者, 畵之爲助, 顧亦大矣.
나는 정유년(1837, 헌종3)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면서 쉬는 날이면 화공에게 예전에 재직했던 관아를 그리고 전도(全圖)의 첩을 장정하라고 명하고서 그 옆에 장소와 맡은 직임을 기록하였는데 한 관아를 옮길 때 마다 다시 그렇게 하였으니, 훗날의 고찰에 대비해서였다. 제수되었으나 사은숙배하지 않은 곳과 나가서 관아에 부임하지 않은 곳은 모두 우선 빼고 싣지 않았으니 번잡함을 생략한 것이다.
余自丁酉, 始從仕, 以暇日, 命畫工, 模其宿踐之衙, 粧成全圖之帖, 旁識其坊里職掌, 每遷一官, 輒復如之, 蓋備後考也. 其除而未肅命者、出而未赴衙者, 竝姑闕而不載, 省其繁也.
이 도첩은 장난삼아 그린 것에 불과하니 참으로 쓰이리라 기대하기에는 부족하나 너르고 시원한 문장(門墻) 간살과 웅장하고 화려한 청사(廳舍) 들보를 한 폭의 그림 속에 그려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벌써 어느 관사인 줄 알 수 있으니, 그림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是帖也, 不過爲毫墨之戱, 固無足有待於用, 然而門墻間架之宏敞, 廳舍棟宇之壯麗, 點綴於一幅之中, 不至其地而已知其爲某司某衙, 非畵, 曷能是哉?
나는 세파에 따라 부침하는 하급 관료나 당세를 경영할 뜻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만약 태평성대를 만나 내직과 외직을 두루 맡아 제수하는 곳마다 그림을 그리고 이어 장정한다면 내직의 온갖 각사(各司)와 외직의 여러 관아를 모두 이 도첩에 넣어 후세 사람들이 옛 제도의 어렴풋한 모습을 고찰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나의 진퇴와 출처를 평론하게 할 줄 어찌 알겠는가. 아, 그림이 참으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余雖浮湛下僚, 蓋未嘗無當世志也, 使其遭際昇平, 歷試中外, 隨除輒畵, 續以粧之, 則內而百司, 外而列省, 安知不盡在斯帖, 而使後之人, 有以考舊制之髣髴, 亦足以尙論吾之進退出處乎? 噫, 畵固不爲無助矣.
명성을 이루고 벼슬을 물러나 각건쓰고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은 차림으로 만년에 한가롭게 노닐면서 이 그림을 꺼내 살펴보면, 예전에 벼슬하러 돌아다녔던 자취가 역력히 마음에 남고 출세하고 밀려나면서 즐겁고 근심했던 기억이 역시 가슴 속에 느껴질 것이다. 우선 서문을 써서 후세에 전해질 완상품으로 삼노라.
若其名成身退, 角巾杖屨, 優遊乎晩境也, 出此圖而觀之, 則疇昔宦遊之跡, 歷歷在心, 而升沈憂樂, 亦將有感于中者矣, 聊爲序俾作傳世之玩.
헌종 6년 경자(1840, 헌종6) 초여름 하석도인이 정관헌에서 쓰다.
上之六年庚子孟夏 霞石道人題于靜觀軒
자신의 인생에 기념할 일을 남기는 작업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스마트 폰과 SNS의 발달로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사진과 글로 남길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바로 그림으로 남겨 전수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록화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域儀軌)》 등의 궁중기록화가 있다. 또한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통신사행렬도(通信使行列圖)》 등의 사행(使行) 여정을 담은 사행기록화(使行記錄畵)나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나 《연정계회도(蓮亭契會圖)》처럼 소속 관아 동료들끼리 인연에 대한 기념으로 그린 관청계회도(官廳契會圖) 등의 관청기록화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일생에서 기념하고 싶은 사적과 공로를 남기기 위한 사가기록화(私家記錄畵)가 있다. 대체로 《경수연도(慶壽宴圖)》, 《회혼례도(回婚禮圖)》, 《방회도(榜會圖)》 등을 가리킨다.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는 하석(霞石)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31세 때 목릉 참봉으로 처음 벼슬하던 때부터 72세 때 공조참판에 이르는 42년간 자기가 근무하던 관아를 그림으로 그려 둔 화첩이다. 이전에는 남구만의 《함흥내외십경도(咸興內外十景圖)》, 이형상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 지방관들이 순력(巡歷), 혹은 부근 명소를 유람한 뒤 자신의 환유(宦遊)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필교가 자신의 평생 관력(官歷)을 그림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이다.
《숙천제아도》는 총 15장으로, 8장의 중앙 관아도와 7장의 지방 관아도로 나누어진다. 그림을 그린 그 목적은 늘그막에 자신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관아의 옛 모습을 상고할 때 자료로 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림 우측변에 관아의 이름과 위치, 자신이 제수된 날짜를 썼다. 중앙 관아는 자신이 맡은 업무, 지방 관아는 서울과의 거리도 기록하였다. 중앙 관아는 도화서 화원들을, 지방 관아는 군관화사(軍官畵師)를 초대하여 그렸을 것이다. 이는 그의 고조가 대사헌 한현모(韓顯謨)이고, 그의 장인이 19세기 대표적인 경화세족의 하나인 홍석주(洪奭周)라는 가문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중앙 관아 조경의 특징은 실용적 성격의 앞마당과 경관적 측면이 강조된 뒤뜰을 연계시킨 외부공간의 확장성 그리고 쾌적성, 경관성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된 수경시설[方池]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지방 관아도는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터잡기와 공간 구조는 물론 환경설계원칙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배산임수 체계이며,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관아시설, 그리고 3단 1묘의 제례처 등 도성에 준한 토지 이용과 배치 규범을 적용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인 기념으로 그림을 남겼지만 후세에는 중앙 및 지방 관아의 공간 구조와 문화경관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독보적 실증 사료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SNS는 자신의 생활을 타인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창구로서의 큰 역할을 하지만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나의 역사를 꾸준히 기록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고, 이는 옛날 일기나 문집의 역할을 대체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이재난고(頤齋亂藁)》, 《흠영(欽英)》 등 개인의 성실한 기록은 역사를 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듯, 먼 훗날 21세기의 문화와 생활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SNS를 통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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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제아도 사복시(출처-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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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제아도 재령군(출처-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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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도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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