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문징명의 그림과 시

백광욱 2014. 7. 24. 09:39

문징명의 그림과 시

 

 

 

문징명의 그림과 시

초탈한 듯 이끼 낀 바위에 앉아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다 잊었네
고목이 이 사람과 비슷하여
반갑게 서로 마주하여 한가롭네

翛然坐苔石
忘往亦忘還
古木此身似
問年相對閑

- 유숙(柳潚, 1564~1636)
「고화첩에 쓰다(題古畵帖)」
『취흘집(醉吃集)』
 


  1608년 유몽인(柳夢寅)은 이런저런 친인척 관계로 얽힌 7명의 문인들과 중국에서 들여온 『고씨화보(顧氏畵譜)』를 펼쳐 놓고 한 작품에 한 수씩 시를 짓기로 하였다. 유몽인이 먼저 짓고 차례대로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유몽인의 조카 유숙이 그때 지은 것이다. 『고씨화보』는 1603년 항주 출신의 화가 고병(顧炳)이 판화로 제작한 것으로 육조 시대의 고개지(顧愷之)로부터 명대의 왕정책(王廷策)에 이르기까지 산수, 인물, 화조 등에 뛰어난 화가의 작품 하나씩을 뽑아 판화로 제작하고 뒤에 작가의 간략한 인적 사항과 특징, 그림에 대한 견해 등을 기록한 화보이다. 『고씨화보』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호민(李好閔)이 1608년에 사신으로 가서 옥하관(玉河館)에서 『고씨화보』를 보았다는 『오봉집(五峰集)』의 기록이 가장 앞선다.1)

  이 화보를 앞에 놓고 시를 지은 사람은 어우 유몽인을 필두로 녹문(鹿門) 홍경신(洪慶臣), 창주(滄洲) 차운로(車雲輅),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해봉(海峯) 홍명원(洪命元), 구강(九江) 변응벽(邊應璧), 남옹(南翁) 김치(金緻) 등 총 8명이었는데, 현재 문집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유숙과 홍서봉, 홍명원 세 사람뿐이다. 이 중에 유숙의 시에는 소주(小註)가 붙어 있어 당시의 정황과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시 아래에도 “나무는 늙었고 가지는 부러졌는데 이끼가 나무 등걸을 둘러쌌다. 어떤 사람이 길가에 홀로 앉아있는데 그 멍한 모습이 마치 짝을 잃은 것만 같다.[木老枝損, 苔蘚滿身, 有人獨坐路上, 嗒然似喪其耦者.]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 산수도(山水圖) 책(冊). 28.6×15.9 고궁박물원 소장. 

  
  『고씨화보』에 실린 이 그림은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문징명의 「산수도」 책에 실려 있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문징명의 그림에 자주 보이는 고목과 너럭바위가 화면 전면에 자리 잡고 그 앞에 물이 흘러간다. 시에 써 놓은 대로 어떤 고상한 선비가 바위에 앉아 물을 보며 무연한 표정으로 사념에 빠져 있는데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가 눈에 띈다. 유숙의 시에 쓰인 ‘문년(問年:몇 해 만인가를 묻다)’이란 말은 당나라 사공서(司空曙)의 시에 ‘친구와 강호에서 이별한 뒤 산천에 가로막힌 지 몇 해던가. 문득 만나니 오히려 꿈만 같은데 서로 슬퍼하며 몇 년 만인가 물어보네.[故人江海別,幾度隔山川. 乍見翻疑夢,相悲各問年.]’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친구 간의 반가운 해후를 표현한 말이다. 이 시에서는 그림에 보이는 고목을 그림 속의 인물과 친구로 설정하여 그 인물의 정신과 의표를 그림이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한 것이다. 홍명원(1573~1623)이 지은 시를 하나 더 본다.

나무가 늙어 묵은 이끼 쌓였고
산이 깊어 계곡 물이 파랗구나
그 가운데 고인 풍의 사람 있어
우두커니 물아의 경지에 든 저물녘

樹古古苔積
山深溪水碧
中有貌古人
頹然坐忘夕

                                           「고씨화보에 적다[題顧氏畫譜]」

  앞 시에 ‘소연(翛然 :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고 초탈하다)’란 글자를 써서 시의 분위기를 잡았다면 이 시에서는 좌망(坐忘 : 나와 대상을 다 잊고 도에 합치되는 경지)이라는 글자를 놓아 그림 속 인물의 내면을 묘사했다. 아닌 게 아니라 홍서봉은 무하유향(無何有鄕 : 아무런 인위적인 것이 없는 이상향)이라는 문자를 써서 세 사람 모두 『장자(莊子)』의 철학을 시에 원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목이 서로 비슷했던 것일까.

  이들의 아취 있는 모임은 이른바 ‘오파(吳派) 문인화’로 그려졌다. ‘오파 문인화’는 명대에 중국 소주 지역에서 꽃피었으므로 그곳의 옛 지명을 따서 이들 유파를 ‘오파’라 부른다. 이 오파의 창시자가 심주이고 그 대표적인 후계자이자 만개한 사람이 바로 문징명이다. 문징명은 동진의 왕희지와 당나라의 안징경, 원나라의 조맹부 집안처럼 시문과 서화로 이름을 떨친 손꼽히는 가문인 데다가 당나라의 왕유나 송나라의 소식처럼 시서화에 두루 능한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특히 문징명은 90세까지 장수하여 동갑내기 화가 당인(唐寅)과 10년 연상인 서법가 축윤명(祝允明) 등이 세상을 떠난 50대 후반 이후엔 소주 예원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탄탄한 학문적 바탕과 시문에 대한 조예를 토대로 서화 예술의 꽃을 피웠다.

  1600년에 우의정 김명원(金命元)이 서화에 안목이 상당히 높았던 선조에게 문징명의 글씨를 바쳐 상을 받았다는 실록의 기사를 보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문징명의 글씨와 그림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문징명이 보여준 시서화를 아우른 격조 있는 문인화가 중국에서처럼 화려하게 꽃을 피우지는 못하였다. 지난봄 심주의 제화시를 몇 편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문징명의 시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문징명의 그림은 대체로 한가하고 탈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분위기가 밝고 시의(詩意)가 풍부하여 아사(雅士)의 사랑방에 걸어두기에 제격이다. 해 질 무렵, 비 온 뒤, 안개가 걷힐 때 등의 시간이나 물, 바위, 소나무와 오동나무, 대나무 등의 나무들, 그리고 서실과 정자 등의 건물, 차(茶), 금(琴), 책, 다리, 지팡이 이런 사물들이 상호 결합하여 고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는 붓을 바르게 세워 나무의 외곽선을 그리고 서법의 필법을 구사하여 그림의 격조를 더 한다. 화폭은 세로로 길고 좁게 되어 있어 가까운 장면의 묘사와 먼 산의 운치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설색은 아취 있는 생활을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세련된 감각을 느끼게 한다. 그림 속의 인물은 오솔길이나 계곡 다리 위를 한가롭게 거닐기도 하고 정자에 앉아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시며 냇가 바위에 앉아 물을 감상하거나 물소리를 듣는다. 그늘과 솔바람의 시원함을 느낀다. 이번 고궁박물원에서 낸 도록에 「냇물 소리를 들으며[聽泉圖]」라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에 적힌 시이다.

빈 산 해는 지고 비 금방 걷히니
안개 숲 어둑하고 물은 넘쳐흐르네
어떤 은자 홀로 마음 바쁘지 않아
맑은 물소리 듣느라 머물러 있네

空山日落雨初收
煙樹沈沈水亂流
獨有幽人心不競
坐聽寒玉竟遲留

  이 그림에서 냇물 소리를 감상하는 작품 속 인물은 초록과는 보색 관계에 있는 주황색 옷을 입고 있어 눈에 잘 띄게 그려 놓았는데 그 색조가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넘쳐흐르는 냇물과 싹이 돋는 나무와 둔덕의 풀빛, 그림엔 생명력이 충일하다. 그 가운데 앉은 한 시인이 물소리를 감상하느라 갈 길을 잊고 머물러 있다는 내용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면 절로 들뜨고 거친 마음이 치유될 것만 같다.

  문징명의 그림에는 산속 정자나 서재에서 손님을 맞아 담소를 나누거나 혼자 있는 그림이 많은데 그 때마다 항상 차가 함께 있다. 술이 아니다. 「품다도(品茶圖)」는 문징명 자신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

푸른 산 깊은 곳이라 먼지 하나 없고
마주 한 트인 창 시내 향해 열려 있네
곡우 갓 지나 차 마시기 참 좋은데
차 솥에 물 끓자 정다운 벗 찾아오네

碧山深處絶纖埃
面面軒窓對水開
穀雨乍過茶事好
鼎湯初沸有朋來

  이 그림은 유명하여 고궁박물원에서 원래 크기대로 족자를 만들어 팔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에 낸 도록 설명에 의하면 위작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권귀들의 요청엔 응하지 않았지만, 그 지방 사람들의 부탁은 선선히 들어주어 그림 수요를 다 감당하지 못한 문징명이 제자를 시켜 대필하기도 했고, 그곳 사람들은 문징명의 그림을 팔아 부유하게 살았으며 생전에 이미 위작이 많이 나돌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 위작 문제는 문징명 그림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지팡이 짚고 계곡의 다리를 건너며[溪橋策杖圖]」라는 그림은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았는데 시가 좋아 소개한다.

단장에 봄옷 상쾌하게 나선 나들이
늦봄 시절에 서쪽 계곡 들머리
해는 길고 무성한 나무 푸른 그늘 드리웠고
비 그친 먼 산에 푸른 옥이 떠 있는 듯

短策輕衫爛漫遊
暮春時節水西頭
日長深樹靑幃合
雨過遙山碧玉浮

  문징명의 제화시는 이처럼 시상이 자연스럽고 한가함과 아취 있는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데 시에 쓰인 말들을 보면 백거이나 두보 등 전대 문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징명은 53세에 한림 대조(翰林待詔)를 몇 년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고향 소주에서 학문과 시문, 그리고 서화 속에서 묻혀 살았다. 부인 외에는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생활도 아주 모범적이었는데 90세까지 장수를 누리며 만년에 더욱 왕성하게 창작을 하였다. 다음은 「고목이 서 있는 초가집[古樹茅堂]」이라는 그림에 적힌 시이다. 문징명의 생활과 정서를 엿보게 한다.

긴 여름 띳집에 바람과 햇볕 좋은데
나무 우거진 곳 시원하고 조용하네
대나무 둘러싼 이곳 손님 와 편히 쉬고
꽃 지는 시절 주렴에 부딪히며 제비 나네
창옥 불자 들고 맑은 담소 즐기고
산삼차로 쌓인 피로를 풀어보네
도시엔 수레 먼지 바다와 같아도
은자가 거처하는 집에 이르지 않네

永夏茅堂風日嘉
凉陰寂歷樹交加
客來解帶圍新竹
燕起衝簾落晩花
領略淸言蒼玉麈
破除沉困紫團茶
六街車馬塵如海
不到柴桑處士家

  이 시를 지을 때 나이가 70이었다. 여름날 한가롭게 지내면서 이 그림을 그리며 흥치를 일으키고 아울러 짧은 시를 지었다고 관지에 밝혀 놓았다. ‘창옥주(蒼玉麈)’는 푸른 옥으로 장식된 주미(麈尾 먼지털이)를 말하는데 보통 은자들이 이 주미를 흔들며 청담을 나누는 습관이 있다. ‘자단다(紫團茶)’는 자단산에서 나는 인삼으로 일종의 산삼을 말하는 것이다. 시상(柴桑)의 처사(處士)는 도연명으로 자신을 비유한 말이다.

            ▶ 고수모당(古樹茅堂) 책(冊) 지본설색. 66.7×34.8. 고궁박물원 소장

  
  문징명은 『보전집(甫田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35권으로 분량이 상당하다. 연구자에 의하면 시만 2,682수라고 한다. 여름에 어울리는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밤에 앉아[夜坐]」라는 시이다.

무더위라 밤에 잠 못 이루다가
시원한 바람 불자 더위 좀 가시네
일어나 앉아 은하수를 바라보다
오래도록 묵묵히 말이 없네
지는 달은 아직도 빛나는데
반딧불이 홀연히 날아드네
학 울음소리 어디서 들려오나
이슬 내려 옷을 적시려 하네

溽暑夜不寐
凉風初解圍
起看星漢動
坐久語音稀
殘月耿猶在
流螢忽自飛
一聲何處鶴
露下欲沾衣

  문징명은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와 같은 아주 긴 두루마리의 산수화도 남겼다. 강산은 온통 백설인데 유채색 옷을 입은 유람객이 언 강을 지나가는 모습과 갈라진 얼음을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섬세한 표현에 절로 찬탄이 나오고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또 목련, 원추리, 연꽃, 수선화 등을 그린 화훼 작품을 보면 사랑스러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진다.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그린 무수한 그의 작품을 앞에 대하면 여기(餘技)가 단순히 여기가 아닌 어떤 삶의 완성으로 다가온다. 그는 「독락원기」나 「적벽부」 등 문학 작품도 소재로 삼아 그림과 글씨가 어우러진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가 쓴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 글씨 등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게 된다. 

  문징명은 중봉 세필로 아주 공을 들여 그림을 그린다. 몇 년 만에 완성한 작품도 많고 80이 넘어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어느 한 방면에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교유, 처세와 생활, 그리고 시와 글씨와 그림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문징명의 서화에 동서양 학자들의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심주나 문징명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문의 정화를 대하는 것만 같다. 그들의 산수에는 맑고도 높은 선비의 이상과 예술혼이 어려 있다. 

  영국의 중국 회화사 현존학자로 저명한 크레이그 클루나스(Craig Clunas)는 『우아한 빚(Elegant Debts)』이란 책을 통해 문징명의 이런 그림들이 사회적 관계와 의무 속에서 산출된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지금 고궁박물원의 서화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유우진(劉宇珍) 선생 등에 의해 몇 년 전에 중국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고궁박물원에서 나오는 『고궁문물(故宮文物)』은 중국의 서화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잡지로 보이는데, 올해의 4, 5, 6월호는 문징명 특집을 다루고 있다.


1) 구본현, 「『顧氏畵譜』의 전래와 朝鮮의 題畵詩」 『奎章閣』28 참고.
2) 裴原正, 『明代 文徵明의 文學을 주제로 한 繪畵 硏究』, 홍익대 미술사학과 석사논문.

 

 
글쓴이 : 김종태(金鍾泰) / hanaboneyo@hanmail.net
  •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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