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춘당 송준길, 편지를 쓰다
-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同春先生手札)』의 글씨에 대하여 -
송준길 글씨의 명성은 당대에 이미 높았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성가 높은 글씨는 수요가 많게 마련이었다. 그에게는 글씨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필적을 남겼으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글씨 또한 적지 않다. 특히 대학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비문(碑文)은 인기가 높아 많은 수가 제작되었다. 충청도 보은의 〈성운 묘비(成運墓碑)〉, 청주의 〈송상현 신도비(宋象賢神道碑)〉, 경기도 남양주의 〈민광훈(閔光勳) 신도비〉 등 묘비가 많이 있으며, 묘도문 외에 논산의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院庭碑)〉, 전주의 〈화산서원비(華山書院碑)〉 등 기념비 성격의 비문도 적지 않게 남아 전한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인의 입장에선 지극히 사적인 통신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간찰이 서예 감상이라는 심미적 행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적잖은 위화감이 들게 된다. 간찰이라는 사소하고 사적인 대상 그리고 감상이라는 고상한 행위 간 낙차에서 오는 아뜩함과 어색함을 완화하는 데에는, 편지가 감상의 대상이 되어 왔던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오래된 역사에 대한 회고가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전봉투. 봉투 문양으로 ‘편지를 받으니 마치 얼굴을 직접 대하는 듯하다(見書如見面)’이란 문구가 찍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왕실 시전지 중에서.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 국립고궁박물관, 2010, p.239)
후한(後漢) 시대까지 서사(書寫)의 주된 매체는 죽간과 목간이었다. 진한(秦漢) 제국의 거대한 문서 행정 시스템은 간독(簡牘)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종이는 존재했다. 흔히 후한 중엽의 인물인 채륜(蔡倫)을 종이의 발명자로 인식하나, 전한(前漢) 시기의 것도 발굴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종이는 채륜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륜은 기존에 있던 종이를 개량하고 보급한 사람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이전의 종이는 주로 포장재 등의 용도로 쓰였으며, 서사를 위한 매체로는 그다지 쓰이지 않았다.
한편 제국의 안정에 따른 문서 수요의 폭증은 당시 공식 서체였던 예서(隷書)의 흘림체인 초서(草書)의 발달을 촉진했다. 전한과 후한을 거치며 초서는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후한 말 초서의 대유행은 이전에 볼 수 없던 문화 현상이었다. 당시 문인이었던 조일(趙壹)은 이를 풍자하여 〈초서를 비판한다(非草書)〉라는 글을 짓기도 했다.
두도(杜度)와 최원(崔瑗), 장지(張芝)는 모두 세속을 초월한 뛰어난 인재이며, 학문을 하는 틈틈이 취미로 글씨를 썼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흠모하여 오로지 글씨만 일삼고, 그 높은 경지를 좇아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쉬지 않으며 끼니를 때울 틈도 갖지 않는다. 열흘에 붓 한 자루, 한 달에 먹 몇 덩이를 소모하며, 소맷자락은 까맣고 입술과 이빨은 항상 시꺼멓다. 여럿이 모여 앉아 있을 때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거나 풀줄기로 벽을 긋는다. 팔꿈치에 구멍이 나 피부가 쓸리고, 손톱이 부러져 손가락뼈가 드러나 피가 흘러도 그치지 않는다.
夫杜崔張子, 皆有超俗絶世之才, 博學餘暇, 遊手於斯. 後世慕焉, 專用爲務, 鑽堅仰高, 忘其疲勞, 夕惕不息, 仄不暇食. 十日一筆, 月數丸墨, 領袖如皁, 脣齒常黑. 雖處衆座, 不遑談戱, 展指畫地, 以草劌壁, 臂穿皮刮, 指爪摧折, 見䚡出血, 猶不休輟.
당대 최고의 스타 서예가는 단연 장지였다. 연못가에서 글씨에 열중하다가 연못물이 모두 까매지기에 이르렀다는 ‘임지학서(臨池學書) 지수진묵(池水盡墨)’의 고사는 유명하다. 장지의 작품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지만, 전해지기로 그는 장초(章草)에 능했다고 한다. 장초는 글자 사이가 이어지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따로 떨어져 있는 초서다. 당시의 초서가 초서 발전 초기 단계의 모습에서 아직 완전히 탈피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죽간이나 목간에 붓으로 글씨를 쓰다 보면, 나뭇결과 붓질이 길항한 붓의 동세가 그대로 담긴 약동적 획의 모습을 당장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예술적 재미, 심미적 가능성을 극대화한 것이 바로 조일이 비난한 후한 최말기 초서의 모습이다. 공적인 서체였던 예서나 팔분체가 후한의 멸망과 함께 그 조형적 발전을 멈춘 것과 달리, 초서는 왕조의 멸망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이 새로운 예술은 권력의 문자가 아니라 제왕의 업적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진 파생된 잉여였기 때문이다.

▲한대(漢代) 목간(木簡)에 쓰인 초서의 예. 영원기물부(永元器物簿)(부분). 후한(後漢) 시기. 거연(居延) 출토 한간(漢簡).
제국의 멸망, 체제의 붕괴와 함께 문서 서사의 중심도 이제 서서히 종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매체의 교체는 단순한 물질적 대체가 아니었다. 매체의 변화와 더불어 글씨를 쓰고 또 그것을 주고받는 환경 자체가 변화했다. 이 시기 글씨의 중심에는 편지가 있다. 편지, 즉 개인간 사신(私信)은 행정문서나 성인의 말씀을 적은 경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과 정보 그리고 정서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편지의 글씨 또한 공(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私)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희지의 글씨엔 자신만의 독창과 창의가 담겨있었다.
종이 평면은 간(簡) 즉 죽간이나 목간보다 훨씬 넓다. 기본적으로 한 줄, 기껏해야 두세 줄의 공간이 고작이었던 것에 비해 획기적으로 글쓰기의 장(場)이 확대되었다. 이제는 물리적인 단절 없이 글씨가 쓰인 장을 폭넓게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글자 내에서뿐만 아니라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을 뛰어넘는 전체적인 변화와 조화를 바라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글씨는 판독하여 ‘읽는’ 것을 넘어 바라보아 ‘감상’하는 대상이 되고, 편지는 정보 교환의 매체인 동시에 ‘작품’이 되었다.

▲왕희지 ‘첨근첩’.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 책1 중에서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첨(瞻)은 근래 아픈 것을 살펴줄 길이 없어, 다만 슬피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족하께선 크고 작은 가족들이 모두 평안합니까? (편지로) 말하길, 그대가 이리로 와서 머물 것이라 했으니, 기쁜 기다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첨의 병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실 것을 기대할 뿐입니다. 또한 그대가 서울*에 머무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곳은 한갓지고, 기후도 좋습니다. 그러니 그대가 온다면 기쁠 것입니다. 이 심부름꾼이 돌아가 제 뜻을 전하면, 자세히 말씀하고 물어봐 주십시오.
瞻近無緣省苦 但有悲歎 足下小大悉平安也 云卿當來居此 喜遲不可言 想必果 言苦有期耳 亦度卿當不居京 此旣避 又節氣佳 是以欣卿來也 此信旨還 具示問
*서울: 당시 동진(東晉)의 수도였던 건강(建康)을 가리킴


▲왕희지 ‘첨근첩’ 각석.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창덕6714, 조각 1083 뒷면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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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는 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및 중국 서예 명적(名蹟)을 새긴 석각(石刻)이 다수 전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 및 중앙박물관에 나누어 소장되어 있다. 위의 것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유물인데, 어떤 석판의 가운데 부분으로서 ‘첨근첩’을 새긴 것이다. 앞의 2개 행이 없는 것을 보면 편지의 내용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첨근첩’을 오로지 초서 교재로 본 것이다. 이 석판을 통해 조선시대에도 왕희지의 ‘십칠첩’이 글씨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희지의 글씨는 조선 중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원대(元代)의 문인이었던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가 풍미했던 초기와 달리, 조선시대 중기에는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시기에 활약했던 석봉(石峯) 한호(韓濩)와 죽남(竹南) 오준(吳竣) 등의 글씨에서 왕희지 법첩(法帖)의 강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송준길의 시대는 이들보다 다소 뒤로서 중기를 지나 이미 후기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그의 행초서 또한 왕희지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전남대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의 ‘인첩(人帖)’에 수록된 편지(014)의 ‘칭(稱)’에서 우방(右旁, 글자를 세로로 나눈 오른쪽 절반) 부분은 지영(智永)의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의 자형을 채택하고 있다. 지영은 왕희지의 7대손으로서 남조(南朝)의 진(陳)으로부터 수대(隋代)에 걸쳐 살았던 승려이다. 그의 『진초천자문』은 『천자문』을 진서(眞書) 즉 해서(楷書)와 초서 2가지 서체로 쓴 것인데, 왕희지의 글씨를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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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 ‘칭(稱)’의 우방을 쓰는 법은 크게 2가지인데, ‘爯’의 모습을 살려서 쓰는 법이 있고(조맹부 『진초천자문』), 또 ‘聶’의 초서체처럼 2개의 가로획을 그리고 세로획을 내린 후 아래를 크게 돌려서 쓰는 법이 있다.(지영 『진초천자문』) 지영의 『진초천자문』 또한 법첩에 따라 부분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송준길의 ‘稱’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의 예처럼 우방인 ‘爯’의 가운데 점 2개를 더욱 유려하게 흘려 썼다. 물론 초서 ‘稱’을 이런 방법으로 쓰는 것은 조선시대 다른 필적에도 보이며 송준길 고유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송준길의 초서가 왕희지체 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는 된다. 이 외로도 송준길 행초서의 자체(字體, 글자의 전체적 형태)가 기본적으로 왕희지 행초서의 자체를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아마도 송준길은 그 시대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왕희지 법첩을 기본으로 삼아 글씨를 배워 자기 글씨의 기본 체재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체의 기본은 왕희지체이지만, 송준길의 행초서는 왕희지체와 다른 면모 또한 적지 않게 드러낸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글자 전체의 기울기가 심한 점, 즉 의측(倚側)이 심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가로획의 기울기가 심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조선 중기의 황기로(黃耆老)나 양사언(楊士彦) 풍 초서에서 그 예가 보이며, 아계 이산해(李山海)나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초서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풍의 초서의 기원으로는 명나라의 장필(張弼)을 들어야 할 것이다. |

▲아계 이산해와 하서 김인후의 초서
왕희지와 송준길 사이,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왕희지와 송준길 사이, 명성과 숭앙의 차이 또한 거대하다. 게다가 송준길의 글씨는 왕희지체의 먼 아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저 서성의 그것에 비한다면 송준길의 편지 그리고 그 글씨의 가치는 어떠한 것일까? 아래의 예를 살펴보자. 전남대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 인첩(人帖)에 첫 번째로 수록된 편지이다.


[피봉]
關西 巡相 記室
[花押]謹封
令前 拜謝
[본문]
墳庵元日, 百感交中, 想關西千里之外, 猶能諒此情抱也. 承情■多少意, 如對慰浣. 僕之孱疾, 自數十年前, 如不保朝暮, 而今至七袠猶不死, 歷數諸親愛少而壯者, 先我而逝何限, 人事誠不可幾, 惟是國恩報答無階. 昨見永令書, 憂端無窮, 所恃神天默佑之爾. 女息送一壺秋露, 連服之醉甚, 此實醉筆, 必照諒之也. 萬萬不能盡, 只此.
庚戌元朝, 沙山病拙.
[추신]
令公知我暮年飮食衣服齟齬之甚, 每加留念, 良可感愧, 恒母拙甚, 想無自爲叶也, 可笑. 寄來毛浮, 眞是毛深溫厚, 實合老病人親膚之寢臥, 幸甚幸甚. 神枕, 觀玩甚佳且美, 然不適於老人枕頭, 好笑. 嶺伯書來, 所言一如令示, 文拙不能辦, 將如何? 可悶. 光■飢餓, 今春將死矣. 令之留念至此, 乃■再生之秋, 何幸何幸. 幸須毋忽也.
[피봉]
평안도관찰사 기실(記室) 영전(令前)에 절하며 답장함
[花押]삼가 봉함
[본문]
분암(墳庵)*에서 새해 첫날을 맞으니,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듭니다. 천리 밖 평안도에서도 이런 제 회포를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편지를 받고 여러 가지 정다운 말씀을 읽으니, 마치 마주 대한 듯 후련하고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병약하여 수십 년 전부터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이 지내왔습니다만, 이제 일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죽지 않고 있습니다. 아끼는 친지 중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고 건장한 이들을 세어보노라면, 사람의 일이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음만이 분명합니다.
어제 영령(永令)**의 편지를 받아 읽고서, 한없이 걱정되었습니다. 하늘의 도움만 믿을 뿐입니다.
딸이 추로(秋露) 한 단지를 보내와, 연이어 마셨더니 매우 취했습니다. 이 편지는 실로 취해서 쓴 글씨입니다. 틀림없이 헤아려 아시겠지요. 사연이 많으나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경술년(1670년) 설날에 사산(沙山)의 병졸(病拙)***이
[추신]
영공(令公)****께서 만년에 먹고 마시고 입고 지내기가 심히 어려운 제 사정을 익히 아시고 매번 더욱 마음 써 주시니, 정말로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항이 엄마가 못나서 영공께 맞지 못하리라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보내주신 털뜸*****은 정말로 털이 두텁고 따뜻하여, 늙고 병든 제가 살을 대고 눕기에 딱 좋습니다.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신침(神枕)******은 보기에 무척 예쁘고 아름다우나, 노인이 베기엔 적당하지 않습니다. 우습습니다.
경상도관찰사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한결같이 영공이 하신 말씀과 부합합니다. 제 글이 졸렬하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걱정스럽습니다.
광■(光■)이 굶주려 이번 봄에 죽게 되었다가, 영공께서 이처럼 마음 써 주셔서, 다시 살아날 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소홀히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분암(墳庵): 무덤을 수호하며 지내기 위해 지은 집. 여기에서는 은진송씨 가문 선영이 있는 사산(沙山)의 재실을 가리킨다. 사산분암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로194번길 117에 소재한다.
**영령(永令): 김만기(金萬基, 1633~1687). 김만기의 자가 영숙(永叔)이었다.
***병졸(病拙): 병들고 못난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자신을 가리키는 겸사로 썼다.
****영공(令公): 상대방을 높여 이르는 말. 여기에서는 편지 수신자인 사위 민유중을 가리킨다.
*****털뜸: 원문은 ‘모부(毛浮)’. 털실로 뜨개질하여 만든 편물(編物) 모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신침(神枕): 내부에 약재 등을 채울 수 있게 만든 목침의 일종
1670년 새해 첫날 아침을 맞아 송준길이 사위 민유중에게 써서 보낸 편지이다. 이해에 송준길은 65세를 맞은 노인이었고, 민유중은 41세였다. 새해를 맞아 사위에게 보낸 다소 긴 편지다. 본 편지에는 늘그막에 맞은 새해에 든 감상을 주로 담았고, 긴 추신에는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각종 사연을 적었다. 본문에 담긴 감상에는 병약한 노인의 회한이 가득하다. 그러나 슬픈 회한의 와중에도 국가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는 등 책임 있는 사대부의 의리는 잊지 않고 있다. 민유중의 아내인 딸이 보내준 추로(秋露) 즉 소주에 취해 쓴 글씨라는, 어세를 다소 누그러뜨린 가벼운 말도 빼놓지 않았다. 추신에 담긴 사연에는 늙고 병든 장인을 생각하여 털뜸이며 신침이며 갖가지 귀한 물품을 보내준 사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주로 담았다. 읽고 있으면 가족 간 정의가 느껴져 절로 따뜻한 마음이 든다. 자신의 딸을 ‘항모(恒母)’ 즉 ‘항이 엄마’라고 지칭했는데, 여기에서 민유중의 딸(아마도 장녀)의 이름 중 한 글자가 ‘항(恒)’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족 간 편지가 아니면 조선시대 사대부 아녀자의 본명을 알 수 있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기록적 가치가 빛나기도 한다.
본문 중간에 약간 탈락이 있긴 하나 보존 상태 또한 우수하여 송준길의 글씨를 감상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된다. 젊은 시절 그의 글씨는 단정한 면이 강했으나, 나이가 들며 운필이 더욱 유려하고 거침이 없어졌다. 이 편지에서 그러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본문 첫 행, 즉 ‘墳庵元日 百感交中’에서, ‘墳’의 ‘土’변, ‘庵’의 ‘广’의 획은 강력하며, 상대적으로 ‘元日’의 획은 얌전하여 좋은 대비가 된다. ‘墳庵’, ‘百感’, 그리고 ‘交’ 모두 획을 돌리는 운필이 매우 경쾌하다. 그리고 마지막의 ‘中’에서 세로획을 길게 빼는 멋도 빼놓지 않았다.
제5행으로부터 제9행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글씨는 그 조형미가 빼어나다. 제5행 ‘잔(孱)’의 ‘尸’나 제6행 ‘모(暮)’의 초두(艹)를 왼쪽 아래 방향으로 길게 뺀 것은 장필이나 이산해, 김인후 등 분방한 초서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 동세 또한 좌하 방향의 기울기가 다소 강하다. 그러나 그 어떤 자체(字體)도 왕희지체 초서의 정법(正法)을 어기지 않았으며, 글자 체세(體勢) 및 일부 획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판독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자체의 균형을 어그러뜨린다거나 중봉(中峰)의 획법을 어기는 일이 없다. 이러한 기조는 둘째 장의 긴 추신이 끝날 때까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속 유지된다. 송준길 글씨의 전아함은 일부 의측과 과장의 변격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이 편지는 조선 사대부의 아정한 글씨의 대표로서 손색이 없다.
〈돈암서원 원정비〉 탁본. 『한국금석문대계』 권2, 조동원 편, 원광대학교출판국, 1979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도록 제2책), 국립고궁박물관, 2010
〈영원기물부〉. 윤성훈, 『한자, 문명의 무늬』, 교유서가, 2026, p.246.
清乾隆三希堂法帖(一)冊, 晉王羲之瞻近帖龍保帖. 國立故宮博物院, 台北, CC BY 4.0www.npm.gov.tw
唐敦煌臨本王羲之瞻近龍保帖 Tang Dynasty, Dunhuang copy of Wang Xizhi's Zhan jin 、Long bao tie, British Library, scroll(Or.8210/S.3753), manuscript, ink on paper, International Dunhuang Programme (https://idp.bl.uk/collection/768595D80B5648E7ABA8DD5A83A4C149/)
『조선왕실의 각석』(국립고궁박물관, 2011), p.200.
지영(智永)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청구기호: K1-204) 디지털 장서각 사이트(https://jsg.aks.ac.kr/)
위의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청구기호: 가람古754.3-J561j) 규장각 사이트(https://kyudb.snu.ac.kr/main.do)
조맹부 『진초천자문』, 전본 다수.
한호 『초서천자문』, 전본 다수.
이산해(李山海), 〈제관악산인정각시권(題冠岳山人正覺詩卷)〉, 『조선중기서예』(예술의전당, 1993)(예술의전당 1993년 ‘조선중기서예전’ 도록), pp.58~60.
김인후(金麟厚), 『초서천자문(草書千字文)』.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동원5306)
송준길 『동춘선생수찰(同春先生手札)』,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청구기호: OC 4H 송77)
글쓴이 :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실 승정원일기번역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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