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송이송이 핀 꽃을 보게 되리라

백광욱 2026. 3. 17. 05:02

 

송이송이 핀 꽃을 보게 되리라

 

매화 형은 나를 저버리지 않아
신의를 지키며 노년에 이르렀네
간을 맞추는 일은 요구하지 않으니
마치 설자를 만난 듯하였네

 

梅兄不棄我       매형불기아
相守到殘年       상수도잔년
未問調羹事       미문조갱사
如逢雪子然       여봉설자연

- 김도화(金道和, 1825~1912), 『척암집(拓菴集)』 「뜰에 핀 매화[庭梅吟]」

 

겨울인가 봄인가 싶지만 매화의 계절은 이미 성큼 찾아왔다. 매화 꽃망울이 쨍하고 빛나면 고운 볕 아래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것 같다. 봄의 초입에 서서 긴 겨울을 살아간 어느 의병장의 매화시 한 편을 감상해 보고자 한다.
 
  노년이 된 시인이 매화 고목 앞에서 가슴 켜켜이 쌓인 회포를 나누며 한결같음에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3구의 ‘조갱(調羹)’은 국의 간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데, 매실과 소금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라의 재상처럼 쓸모 있는 인재를 말한다. 4구의 ‘설자(雪子)’는 온백설자(溫伯雪子)라는 인물로,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존재를 말한다. 공자가 오랜 기다림 끝에 그를 만나 보고는, 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무엇을 해 주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무엇이 되는 존재가 매화이기에, 시인도 ‘매실’이라는 결실을 요구하지 않은 듯하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을 틔우니, 마음의 겨울이 지나고 가장 먼저 찾고 싶은 존재가 매화였을 것이다.
 
  척암 김도화는 퇴계의 정맥을 이어받아 평생 출사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69세에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지만 여전히 처사로 자임하였다. 그러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의병 논의에 참여하였고, 이윽고 안동 의병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집집마다 의연금을 모으고 의병 부대에 투신하는 등 구국의 기치가 치솟은 안동에서, 중망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김도화는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지게에 실려 산을 넘을 정도로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이었으나, 김도화는 시종일관 의병장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각지에 준엄한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들의 의기를 고취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은 일본군의 우세한 전력 앞에 고전하였고, 태봉과 봉정사 등에서 공방을 벌이다 결국 크게 패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의병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안동 전역이 불바다가 되고 약탈이 자행되는 등 피해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패퇴 이후 지역 사회의 지원이 위축되고 고종의 해산 명령까지 내려지자 안동 의병은 얼마 가지 못해 해산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김도화는 사림들을 설득하고 지속적으로 의병 항쟁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의병 해산 이후에도 김도화는 지속적으로 상소와 격문을 작성하며 저항의 불꽃을 사그라뜨리지 않았고, 1912년 향년 88세에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서거하였다.
 
  나라의 녹을 먹은 적도 없는 그가 이렇게 목숨을 바쳐 헌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술년 국권이 피탈되자 상소를 올려, 한 줌의 땅과 한 사람의 백성도 군주의 소유물이 아닌데 자기 전답을 매매하는 것처럼 나라를 파느냐며 통박한 것을 보면 맹목적 충성심이 그를 이끈 것은 아니었다. 을미의병 당시 작성한 격문에서는 “남의 손에 죽을지언정 사람들의 입에서 죽고 싶지 않으며, 남의 도끼에 죽을지언정 후대의 붓에 죽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의 삶의 지향점이 ‘살신성인(殺身成仁)’과 ‘사생취의(捨生取義)’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이 시도 다시 해석해 보면 ‘이렇게 양심을 지키며 잘 살아왔다’고 매화 앞에서 스스로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만년에 그가 최익현, 민영환,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의 열전을 집필한 것 역시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양심을 확인할 수 있는 당대의 지사들이 매화 같은 벗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 내리는 섣달 어느 날에 그의 손자가 시를 지어 바치자, 이를 기특하게 여겨 “봄기운 온통 머금고 있으니, 송이송이 핀 꽃을 보게 되리라.[箇裏渾含春意思, 會看前頭葉葉花.]”라는 시구로 화답한 일이 있다. 겨우내 봄물을 저장하는 나무는 머지않아 봄이 온다는 것을 믿고 있을까. 노년에 일제 강점기를 맞이한 시인의 시대 배경을 생각한다면 봄을 확신하면서 겨울을 갈무리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봄이 오든 안 오든 겨울나무에게 물을 주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마냥 겨울이어도 나무를 가꾸었을 것이다.
 
  송이송이 꽃 핀 세상을 그의 손자가 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손자의 아들과 그 아들은 광복된 세상을 보았다. 겨울이 길면 봄을 준비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긴 겨울에 묵묵히 나무를 가꾸는 일이 있었기에 송이송이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봄볕 아래 모두의 새싹이 파릇파릇 빛나길 기원한다.

 

글쓴이  :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교육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왕사남"  (0) 2026.03.24
참는 자가 강한 자다  (0) 2026.03.11
동춘당 송준길, 편지를 쓰다  (2) 2026.03.06
슈퍼문 아래에서  (0) 2026.02.20
올해 소원  (0) 2026.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