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여름밤의 길이

백광욱 2024. 8. 9. 20:48

 

여름밤의 길이

 

병 치르고 일어나니 봄바람은 간데없고
시름겨운 여름밤은 길기도 해라

 

病起春風去, 愁多夏夜長.

병기춘풍거, 수다하야장.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제4권 시문집 시(詩), 「밤(夜)」

 

마흔 살의 다산(茶山)은 장기(長鬐)의 적소에서 맞은 봄을 병치레로 보내고 처음으로 견뎌내는 여름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나마 설핏 든 잠을 흔들어 깨우는 건 떠나온 곳을 향한 그리움. 여름밤이 길기는 강진(康津)으로 옮겨지고 세 해가 지나서도 그 이듬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기를 미워하다(憎蚊)」에서 “가마득한 여름밤이 한 해만큼 길어라(漫漫夏夜長如年)”라 읊고 「차운하여 황상의 보은산방에 부치다(次韻寄黃裳寶恩山房)」에서는 “여름 이 밤이 몹시도 길구나(夏夜覺苦永)”라며 “너는 구름처럼 높은 산방에 누워, 뼈와 살이 서늘토록 쉬고 있겠지(憶汝雲臥高, 偃息肌骨冷)”라고 하였는데, 두 해 여름 공히 달려드는 모기나 벼룩 탓을 들었다. 그러나 여름밤을 길게 하는 까닭이 어찌 고향집 서쪽 담장에 드리울 달그림자 생각이나 물리쳐도 물러날 줄 모르는 미물이며 더위만이었을까.
 
  여름, 밤은 어찌하여 이리도 길까. 이러한 심사는 일찍이 굴원(屈原, 기원전 343~278)의 『초사(楚辭)』 「구장(九章)」 ‘추사(抽思)’에 보인다. 그는 유배된 한북(漢北)에서의 두 번째 여름에 “이렇게 여름밤은 짧아지고 있건만, 어째서 하룻밤이 일 년 같을까(望孟夏之短夜兮, 何晦明之若歲)”라고 하였다.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은 함안(咸安)으로 배소가 옮겨진 스물여덟 살의 한밤, 일천팔백 년 전쯤 꼭 닮은 여름을 보낸 굴원에 기대어 “여름밤이 짧은 줄 모르겠나니(夏夜不知短)”라 하였다 다음해 거제(巨濟)에 갇히게 되어서는 “여름밤이 길디길어 시름겹구나(夏夜愁苦長)”라고 거듭 말한다. 초목조차 영원히 살 듯 무성히도 잎 피우는 여름이거늘 도리어 영락(零落)한 이에게 밤의 길이는 자연의 이치와 거꾸로 흐르는 것이다.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가오고략(嘉梧藁略)』에 「긴 여름밤(夏夜長)」 세 수를 남겼다. 그는 “사람들 모두 가을밤이 길다고 하지 여름밤 길다는 말은 않지만 산속에 살며 일이 없으니 여름밤 또한 길기에(人皆謂秋夜長, 無夏夜長之語. 山中無事, 夏夜亦長)” 시를 지었다고 『임하필기(林下筆記)』 「벽려신지(薜荔新志)」에 적어두었다. 이때의 기록이란 양주(楊州)로 물러나와 내키는 대로 사는 뜻(退居自適之意) 아님이 없다 하고 시에서 짐짓 “주시는 겨울밤이 길다 하였고, 당시는 가을밤이 길다 했건만, 나는 어째서 긴 여름밤 괴로울까, 근심도 없거니와 상심치도 않았건만(周詩冬夜永, 唐詩秋夜長. 如何苦夏夜, 非憂又非傷)”이라 하였다. 그러나 진정 마음에 아무 일이 없다면 한밤에 홀로 깨어 떨어지는 빗소리에 어두운 귀를 기울일 리 있었을까.
 
  여름, 밤은 그리하여 나에게만 길다. “남들은 여름밤이 짧다 하지만 나에게 여름밤은 길기만 하다(人言夏夜短, 我覺夏夜長)”고 하였던 것은 수촌(水村) 임방(任埅, 1640~1724). 공부를 위해 아우와 함께 산사에 들어갔다 역병에 걸려 홀로 돌아와 병석에 누워버린 긴 여름밤, 실상 그 밤은 새벽의 닭 울음과 종소리마저 어느덧 그칠 만큼 짧을 터였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짧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라며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지만 계절은 틀림없이 “개똥불이 흐르고 벌레가 우”는 여름밤. 그 “긴 밤은 근심 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온다. 겨울밤이 길다는 건 설령 서경(敍景)일 수 있겠으나 여름밤이 길다는 건 오직 서정(敍情)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계(四季)의 밤 가운데 가장 짧은 여름밤이야말로 정녕 가장 긴 밤인 것이다.

 

 

글쓴이   :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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