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더위 견디기

백광욱 2024. 8. 22. 00:04

 

더위 견디기

<달밤 물에 발 씻기[月夜濯足]> 

 

나직한 처마서 근심 풀며 석양 보내니
하얀 달의 흐르는 빛에 낚시터가 서늘한데
노나라 들판의 어부가로 물 흐린 것 걱정하고
진나라 정자의 계제사에 난초 향기 떠올리며
물장구는 물결 쫓는 오리 배우려는 것 같지만
닦아 말리니 젖기 싫은 염소 도리어 같아지고
친구들 손 맞잡고 모두 깊이 잠들었지만
명아주 침상을 비추는 아침 해에 부끄럽잖네

 

矮簷排悶送殘陽        왜첨배민송잔양
素月流輝釣石涼        소월류휘조석량
魯野漁歌愁水濁        노야어가수수탁
晉亭禊事憶蘭香        진정계사억란초
瀊回欲學隨波鴨        반회욕학수파압
晞挋還如畏濕羊        희진환여외습양
社友相携渾睡熟        사우상휴혼수숙
不羞紅旭照藜牀        불수홍욱조려상

 - 정약용(丁若鏞 : 1762~1836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6권 「송파수작(松坡酬酢)」, <더위를 식히는 8가지 방법[消暑八事]> 중 제8수

 

여름은 좀 더워야지 안 더우면 여름이냐고 하지만 요즘은 더워도 너무 덥다. 올해 5월 20일부터 8월 6일까지 질병관리청에 신고된 온열질환자의 수가 1,800명을 넘었고 이 중에서도 17명은 사망자일 정도로 무더위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아직까지 2018년의 기록적인 더위에는 못 미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더위를 마주한 사람에게는 지금이 가장 더운 때이고, 가장 괴롭다.
 
  언제부터 여름이 이렇게 더웠는지는 모르지만, “칠월 신선에 팔월 도깨비”, “삼복더위에 쇠뿔도 꼬부라든다.”, “더위 먹은 소 달만 보아도 헐떡인다.”, “삼복에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 “오뉴월 더위에 염소 뿔도 녹는다.” 등의 더위에 관한 수많은 속담과 국립국어원에서 사용을 권하는 불볕더위에 해당하는 ‘폭염(暴炎)’, ‘폭서(暴暑)’, ‘혹서(酷暑)’, ‘맹서(猛暑)’, ‘열파(熱波)’, ‘혹염(酷炎)’, ‘교양(驕陽)’ 등의 단어가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여름 더위는 그 옛날부터 있었고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더위는 그냥 그대로 맞닥뜨리기 어렵다. 피하는 것이 최고다. 그래서 예전부터 더위를 피하는 방법 즉 다양한 피서법이 사용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빙(半氷)」 조에 해마다 여름 끝 달에 여러 관사와 종친 및 문무관 중 당상관, 내시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는 내용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얼음을 사용하여 더위를 피하는 것은 종친이나 고위 관리 정도가 되어야 가능했다. 그래서 당시의 피서법은 지금 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소박하기 그지없다. 성종은 물만 밥[水飯], 영조는 미숫가루 물을 먹고 더위를 견뎠으며, 정조는 그냥 참았다고 한다. 아무리 더워도 궁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임금들은 대궐의 후원에서 햇빛을 피하며 여름 특식을 먹는 것으로 여름을 났다고 하니 임금이라는 지위도 피서에는 큰 도움이 안 된 듯하다.
 
  왕과 달리 민가에서는 다양한 피서법이 이용되었지만, 서민들의 경우 한여름이 농번기였기 때문에 더위를 피해 먼 곳으로 가기 어려웠다. 서민들은 주변의 냇가에서 천렵을 하거나 멱을 감고 등목하며 더위를 견뎠고, 양반들은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잊는 탁족(濯足)이나 산에 올라가 상투를 벗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옷을 벗어 몸을 볕에 말리는 풍즐거풍(風櫛擧風), 또는 후한(後漢) 말에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자제와 함께 하삭(河朔)에서 삼복(三伏)의 더위를 피할 목적으로 밤낮으로 술자리를 가졌던 고사에서 유래한 하삭음(河朔飲)의 술자리로 더위를 피했다.
 
  이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면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겼고 현재까지도 애용되는 피서법은 탁족이라 보인다. 『맹자』의 「이루」 상편 8장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는 동요가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조선시대의 수많은 글과 그림의 소재로 사용될 정도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피서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 정약용도 63세가 되던 1824년 <더위를 식히는 8가지 방법[消暑八事]>이라는 8수의 연작시를 지으면 그 중 마지막 수에서 탁족을 언급하였다. 
 
  정약용이 제시한 8가지 방법은 소나무 단에서 활쏘기[松壇弧矢], 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槐陰鞦遷], 빈 누대에서 투호 놀기[虛閣投壺], 시원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淸簟奕棋], 서쪽 못에서 연꽃 감상하기[西池賞荷],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東林聽蟬], 비 오는 날 운자 뽑아 시 짓기[雨日射韻], 달밤 물에 발 씻기[月夜濯足]인데, 마지막 시에서 정약용은 탁족이 나왔던 『맹자』 「이루」편의 내용과 중국 진(晉)나라 때 회계(會稽)의 산음(山陰)에 있었던 난정(蘭亭)의 계제사(禊祭祀)를 거론하고, 이어 탁족하며 친 물장구와 탁족 이후 발을 말리는 장면을 묘사한 뒤 탁족하느라 잠들지 않고 있는 자신은 내일 아침 뜨는 해에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만큼 탁족의 즐거움이 컸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과 달리 정약용의 더위는 쉽게 가시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정약용이 이 시를 지은 이후 <또 더위를 식히는 8가지 방법[又消暑八事]>이라는 8수의 연작시를 두 편이나 더 지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약용은 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모두 24가지나 제시하였지만, 그는 이후로도 더위를 못 견디는 시를 계속 지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어떤 방법으로도 더위를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더위를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정약용의 이런 시를 계속 지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도 이제 그만 더위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어떻게라도 발버둥 치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탁족은 내 적성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순간 갑자기 창밖에서 눈으로 드는 햇살이 힘겨워지면서 차갑게 이슬 맺힌 초록색 병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지만 이렇게라도 여름을 나고 더위를 견딜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글쓴이   :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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