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만 명의 바보들

백광욱 2026. 4. 7. 04:43

 

만 명의 바보들

 

구르는 구슬은 오목한 그릇이 없으면 멈추지 않고

유언비어는 지혜로운 사람이 없으면 그치지 않습니다.

 

流丸, 不得甌臾則不定. 流言, 不得知者則不止.

유환, 부득구유즉부정. 유언, 부득지자즉부지.

 

『승정원일기』 효종 1년 5월 11일, 진사 신석형(申碩亨) 등의 상소(上疏).

 

 

2002년 4월, 서울대의 공식 학보인 대학신문은 만우절을 맞아 특별판을 발행했다. 당시 서울대의 중요 현안과 구성원의 관심 사안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가상기사를 실은 것이다. 학교를 대기업에 매각하여 민영화한다는 기사, 학교 내 공용 공간을 외부에 유료 개방한다는 기사부터 교내에 지하철역이 생긴다는 기사(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입구까지 걸어가 본 사람은 이 기사의 파급력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일 학생 식당이 무료로 운영된다는 기사까지. 이 특별판은 며칠 동안 학내의 큰 화제가 되었고, 학내 구성원의 반응은 엇갈렸다.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을 너무 가볍게 장난거리로 삼았다는 부정적인 반응, 재기 넘치는 사회적 풍자이니 여유와 유머를 갖고 긍정적으로 보자는 반응 등.

  얼마 뒤 서울대 언론정보학부의 연구자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분석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우선 기사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사람들이 가상기사인 것을 알고 전파한 사람들보다 부정적인 반응의 강도가 높았다는 점, 그리고 평소 대학신문을 열독했던 사람일수록 기사의 내용을 사실로 믿은 비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평소의 믿음이 기사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 믿음이 깨졌을 때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보여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은 20년이 지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만우절 거짓말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쉽게 조직되거나 거짓 여부를 직접 밝히므로 금방 사실이 밝혀진다. 완전히 속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통의 거짓말과 유쾌한 장난 사이 어딘가에 있다. 반면 지속적인 기만을 위해 만들어지며 사회적 파급력, 특히 부정적인 영향력이 큰 거짓말이 있다. 가짜뉴스이다.
 
  가짜뉴스의 폐해를 막기 위해 전문가들은 사안의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너무나 어이없고 비논리적인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비판적인 사고 능력만의 문제일까. 

  인간의 행동을 결정함에 있어 사고에 앞서는 것이 감정이다. 감정이 결정을 내리고, 사고는 그 결정을 합리화한다. 그리고 믿음이 된다. 한번 정착된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황당무계한 말이라도 믿음에 어긋나지 않으면 수용되고, 아무리 합리적인 말이라도 믿음에 어긋나면 수용되지 않는다. 치밀한 분석도 믿음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가짜뉴스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합리적인 사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강도는 어디서 올까. 믿고 싶은 마음, 그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람에서 온다. 믿음이 깨졌을 때 느껴야 할 깊은 불쾌감을 꺼리는 마음에서 온다. 제아무리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더라도 믿고 싶은 마음을 이기기 어렵고, 결국 가짜뉴스에 속아 넘어간 수많은 바보 중에 하나가 된다. 어쩌면 속지 않는 것을 거부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평소 대학신문을 신뢰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속았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불쾌해했음을 생각해보자. 

  만우절의 ‘만(萬)’은 숫자 1만이고 ‘우(愚)’는 어리석은 사람, 즉 바보이다. 만우절은 거짓말에 속은 수많은 바보들이 생겨나는 날이다. 이 바보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 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더 이상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가짜뉴스에 속은, 혹은 속지 않는 것을 거부한 수많은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함정에 빠져 오래도록 바보로 살아간다.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비판적인 사고 이전에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싶어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지혜는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글쓴이   :    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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