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서의 시간
추적추적 장맛비에 공무는 한가하여
때마침 여가에 청사(靑史)를 뒤적이는데
한적한 창가에서 작품 활동하는 꼬마 아가씨
책 좋아하는 아비가 맘에 안 들었나 보오
梅雨翛翛簿領疎 매우소소부령소
手披靑簡惜三餘 수피청간석삼여
小娘塗抹閑窓下 소랑도말한창하
似厭爺爺好讀書 사염야야호독서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점필재집(佔畢齋集)』 「개령 현감 정공(鄭公)에게 장난으로 지어 드리다.[戲呈鄭開寧]」
조선 성리학의 계보에서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는 김종직은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1,000편이 넘는 시가 전해지는데 참신한 시각과 유려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한 시는 개령 현감 정난원(鄭蘭元)과의 일화를 배경으로 한다. 정난원이 김종직에게 『고려사』를 빌려 갔다가 돌려주었는데, 책에 먹물이 묻은 상태였고 이에 대해 정난원은 “우리 집 꼬마 아가씨가 한 짓이니 너무 황당해하지 마시오.”라고 사과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
공무도 뜸해진 참에 마침 장맛비까지 내리니 모처럼 찾아온 여가에 미뤄 둔 독서를 할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정적이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이미 코흘리개 딸이 남의 귀한 책에 작품 활동을 하고 난 이후였다. 겸연쩍은 마음에 사과 편지를 보냈더니, 책 주인은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시를 지어 그 순수한 마음이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김종직이라고 왜 책이 아깝지 않았겠는가마는, 책보다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넉넉한 인품이 있었기에 상대의 마음이 더 불편해지지 않게 재치 있는 시를 보내 웃고 넘기려 한 것이다.
2구의 삼여(三餘)는 독서를 하기 좋은 3가지 여분의 시간을 말하는데, 한 해의 여분인 겨울, 하루의 여분인 밤, 계절의 여분인 장마를 뜻한다. 춥고 어둡고 날이 궂을 때 공간적 제약이 오히려 내면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독서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삼여의 선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서란 무엇인가. 글을 매개로 사람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정난원이 원했던 역사서 읽기는 끝내 실패했을지 몰라도 김종직이 고이 담아 준 짧은 시편을 통해 나의 시간에 들어오길 원한 소중한 딸의 목소리를 찬찬히 들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여가는 말 그대로 여분의 시간이다. 아침형 인간을 넘어 갓생(God生)이 트렌드가 된 요즘 사회에 여분을 여분 그대로 남겨 두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삶의 시간을 온전히 정답으로만 채우려고 한다면 오답과 낙서의 자취들은 어디에도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집 세 살 아들을 보며 낙서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까르르 뛰어다니고, 잠시 한눈팔면 집 곳곳에 부지런히 작품을 남겨 놓고, 실수로 넘어져도 깔깔깔 웃으며 다시 일부러 넘어지는 아이. 머지않아 신발도 바로 신고 낙서도 하지 않고 일부러 넘어지지도 않을 테니,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낙서할 수 있도록 뒤에서 가만히 바라봐 주고 싶다.
내 삶의 시간도 모범 답안을 찾는 일들로만 채워지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길지 않은 여분의 시간에 소중한 사람의 낙서를 담아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삼여(三餘)가 주어지든 백여(百餘)가 주어지든 내 삶의 노트는 새까만 문제 풀이로만 가득할 것이다. 겨울이 찾아왔다. 올 겨울은 한 해를 열심히 살아온 결과로 주어진 덤이라 생각하고 아낌없이 누리길 바란다.
글쓴이 :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교육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0) | 2025.12.30 |
|---|---|
| 경신일 밤을 지새는 이야기 (庚申守夜設) (1) | 2025.12.22 |
| 각박하게 처신하지 말라 ! (0) | 2025.12.08 |
| 고불고론 (觚不觚論) (0) | 2025.11.20 |
| 벼 베는 노래 (1) | 202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