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매 한 알의 기쁨
침석에서 전전반측할 뿐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어
유자柚子에 대한 시를 첩운疊韻으로 스무 수 지었다.
…
향기로운 걸 먹고 마시며 향기 나는 물건을 지니거나 품고자 한다면
바로 이 유자 열매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輾轉枕席, 無與晤語, 因作詠柚詩, 疊韻成二十首.
전전침석, 무여오어, 인작영유시, 첩운성이십수.
…
如欲飮芳而餐馨, 佩芬而服香, 捨此柚何以.
여욕음방이찬형, 패분이복향, 사차유하이.
-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약천집(藥泉集)』 「유자를 읊은 시[詠柚詩]」 서문 중에서
낯선 동네에서의 한 시절을 창밖 나무에 열매가 알알이 맺혀 익어가는 일에 기대어 살아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침체기의 시간에 놓여 있었다. 그런 계절의 나에게 비 맞은 열매가 얼마나 커졌는지, 햇살 아래 열매 색이 얼마나 붉게 번졌는지, 혹여 새의 먹이가 되진 않았는지, 아침저녁으로 열매의 안부를 묻는 일은 생활의 제일 커다란 기쁨이었다. 겨우 열매 한 알일지라도, 누군가에겐 하루를 일으켜 세울 힘이 되어줄 수 있다. 그 시절 나의 열매는 자취방 창문을 열면 보였던 나무에 맺힌 감들이다. 연고 없는 동네의 방을 덜컥 계약해 버린 것도 그 방이 있는 길의 가로수인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들에 반해서였다.
그 동네는 가로수뿐 아니라 주택의 마당에도 저마다 감나무 한 그루씩을 기르고 있었다. 꽃이 활짝 핀 화단에 뜬금없이 말간 감 열매 한 알이 떨어져 있다거나, 깊어진 가을에는 껍질을 곱게 깎은 감을 줄줄이 엮어 곶감으로 말리는 장면이 흔히 보였다. 어느 날엔 무심코 동네 길목을 걷다가 한껏 무르익어 무거워진 감이 아슬아슬해도 단단히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장면을 올려보면서, 지금 좀 연약해진 나일지라도 이대로 생활에 밀착해 잘살아볼 수 있으리란 희망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감이 점점 붉은 주황으로 물들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하얀 눈송이가 쌓이고 또다시 새파란 감잎이 돋았다가 노랗게 감꽃을 피운, 감나무의 순환을 지켜볼 때까지 그 동네에서 무사히 살았다. 감을 무럭무럭 키울 만큼 따뜻한 햇볕 가득 드는 동네의 방이 길러낸 나는 그 방에서 잘 지내고 나와 이제 모든 게 한결 나아졌다.
조선시대 경상남도 남해(南海)로 유배 갔던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선생 역시 그곳에 혼자였다. 가을이 깊어져 밤은 더 길어졌는데 잠은 오질 않고, 기력이 허약해 눈까지 어두워져 책도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침상에 누워서도 전전반측할 뿐,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조차 없는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선생이다. 그런 밤마다 선생은 유자나무 열매에 대한 시를 짓다 보니 어느새 스무 수나 모였다고 했다. 내가 홀로 살았던 동네가 감나무로 특별했던 것처럼, 남구만 선생이 유배 가서 머물렀던 남해 어느 마을에는 유자나무가 유달리 많았나 보다. 그 마을에서 유자를 지켜보며 쌓인 이야기를 시로 기록해 모아둔 「유자를 읊은 시[詠柚詩]」의 서문에서 선생은 ‘시를 지으려던 게 아니라, 스스로 적적한 마음을 달랬을 뿐이다.[非以爲詩, 聊自遣意耳.]’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경상남도 남해(南海)로 유배 갔던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선생 역시 그곳에 혼자였다. 가을이 깊어져 밤은 더 길어졌는데 잠은 오질 않고, 기력이 허약해 눈까지 어두워져 책도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침상에 누워서도 전전반측할 뿐,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조차 없는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선생이다. 그런 밤마다 선생은 유자나무 열매에 대한 시를 짓다 보니 어느새 스무 수나 모였다고 했다. 내가 홀로 살았던 동네가 감나무로 특별했던 것처럼, 남구만 선생이 유배 가서 머물렀던 남해 어느 마을에는 유자나무가 유달리 많았나 보다. 그 마을에서 유자를 지켜보며 쌓인 이야기를 시로 기록해 모아둔 「유자를 읊은 시[詠柚詩]」의 서문에서 선생은 ‘시를 지으려던 게 아니라, 스스로 적적한 마음을 달랬을 뿐이다.[非以爲詩, 聊自遣意耳.]’라고 말했다.
「유자를 읊은 시」를 보면 선생은 마을을 거닐다가 유자에 시선을 빼앗겨 자주 유자나무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성였음을 알 수 있다. ‘신사(神祠)를 지나다가 너 때문에 발걸음이 더뎌졌구나, 푸름과 노랑이 섞인 껍질은 비단결처럼 찬란하네.[叢祠爲汝更遲遲, 雜糅靑黃燦錦皮.]’라는 시를 남긴 날처럼 말이다. 이웃 노인이 유자 한 소쿠리를 가져다주었다며 쓴 시에서는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니 비로소 잘 익어서 향과 색, 맛까지 겸한 좋은 과육을 이루었네.[經夏秋冬方得熟, 兼香色味好成肌.]’라면서 계절의 풍파를 무탈하게 지나온 열매들을 기특하게 어루만진다. 또 잠 못 드는 밤 남겨두었을 ‘이 둥근 것이 사랑스러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살포시 만지며 껍질이 상할까 두려워하노라.[愛此團圓放手遲, 輕摩且恐爪傷皮.]’라는 구절을 통해, 등불 켠 방에 덩그러니 앉아 예쁜 유자 한 알을 손에 쥐고 요리조리 살피는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게 스무 수의 「유자를 읊은 시」에는 남구만 선생이 남해 유배지에서 유자의 시간을 관찰하며 느낀 남다른 감회가 오롯이 담겨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향이 진해지고 색을 바꾸며 살도 차오르는 유자 열매를 지켜보는 일이, 당시 쓸쓸한 나날을 견뎌야 했던 선생에겐 유일한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선생의 말처럼, 향기로운 것을 먹고 마시며 향기 나는 물건을 품고 다니려 한다면 이 노란 유자 한 알 말고 무엇이 더 제격이었겠는가.
글쓴이 : 최다정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한자 줍기』・『시가 된 미래에서』 저자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한자 줍기』・『시가 된 미래에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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