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동춘당 송준길, 편지를 쓰다

백광욱 2025. 10. 28. 15:49

 

동춘당 송준길, 편지를 쓰다

-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同春先生手札)』에 대하여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인조, 효종, 현종 대에 걸쳐 활동한 문인 관료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명이었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참찬과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관력도 물론 화려하나,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학통을 이은 예학(禮學)의 대가로서 학자적 명성은 더욱 높았다. 그는 현종 대 내내 유현(儒賢)으로 대우받으며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1인이라는 사실에서도 조선 시대에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송준길을 이야기하며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빼놓을 수 없다. 부계와 모계로 모두 멀지 않은 친척이었던 송시열은 어렸을 적에 한 집에서 머물며 수학하기도 했으며,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함께 배운 동문 사이이기도 하다. 송준길은 정치적 입장 또한 평생 송시열과 함께했다.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치열했던 당대 정치 지형에서 송시열과 송준길은 언제나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대에 미쳤던 영향력의 면에서 송준길을 송시열에 비길 순 없다. 사상과 정치 양면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거인이었던 송시열에 비하면, 송준길은 그 그림자에 가린 조력자였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두 사람은 성격이 판이했다. 송시열은 당대 최고의 지위를 누렸으면서도 언제나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은 투사였다. 송준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고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서도 포용적 관점을 보인 적이 많았다. 1660년(현종 1)은 전해인 1659년 기해년 효종이 사망한 후 자의대비의 상복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기해예송(己亥禮訟)이 격화된 해였다. 3월 16일 사헌부 장령 허목의 상소로 재점화된 논쟁은, 4월 18일 윤선도의 상소로 더욱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온 즉시 송준길은 도성을 나가 귀향길에 올랐다. 명재 윤증의 장인이기도 한 탄옹(炭翁) 권시(權諰)는 송시열ㆍ송준길과 교분 또한 깊은 인물이다. 권시는 4월 24일에 윤선도를 옹호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송준길은 “권시의 본심은 저 사람(윤선도)의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나(송준길)의 귀향을 아쉬워하며 한 말에 불과”(權之本情 不過重彼之死惜我之歸 此外必無他念)하다고 하면서, “그의 천품은 날마다 종아리를 때려 가며 소인(小人)이 되기를 요구해도 소인이 될 수 없는 사람”(權之天稟 雖日撻而求爲小人 亦不可得)이라며 권시를 옹호했다.(이 말이 실린 편지는 동춘당집 권13에 수록되어 있다.) ‘동춘당(同春堂)’이라는 당호는 송준길이 추구한 가치를 잘 보여준다. 봄은 천도(天道)의 사덕(四德) 중 원(元)에 해당하고, 원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며, 사람의 인(仁) 또한 여기에서 나온다. 천지의 공평함이요 모든 선(善)의 근본인 인은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만, 군자는 물아(物我)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기에 자기가 성취한 후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고 한다. 이것이 곧 송준길이 자기 집을 이름 지은 뜻이다. (포저 조익 동춘당기 포저집 권27) 봄의 덕을 함께 누리는 집의 주인, 동춘당 송준길은 온화한 봄바람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글씨 또한 그를 닮아 온화하고 유려하다. 송준길은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높아 많은 필적을 남겼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비문(碑文)은 당대에 인기가 무척 높았다. 충청도 보은의 〈성운(成運) 묘비〉 등 수많은 비문이 있으며, 묘도문뿐 아니라 논산의 〈돈암서원 묘정비(遯巖書院廟庭碑)〉, 전주의 〈화산서원비(華山書院碑)〉 등 기념비 성격의 비문 또한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편액 등 큰글씨도 많이 썼다. 이렇게 비문이나 편액 등 해서(楷書)도 잘 썼지만, 그 글씨의 본령은 역시 행초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엄정하고 단정한 면모도 있지만, 유려함과 부드러움에 더 큰 특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희지 법첩(法帖)의 글씨를 기본으로 하면서, 의측(欹側)과 연면(連綿)이 심한 조선 중기 초서, 즉 황기로ㆍ양사언ㆍ김인후 등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서풍도 일부 흡수한 그의 행초서는 매우 생동감 있고 유려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행초서로 쓰인 송준길의 간찰, 즉 편지는 일상사 자료로서 가치뿐 아니라 서예 감상의 대상으로서 갖는 가치 또한 대단히 높다. 이 글에서 이제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송준길의 간찰첩에 실린 편지 몇 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춘선생수찰(同春先生手札)은 전남대학교 도서관(청구기호: OC 4H 송77)에 소장되어 있는 송준길의 친필 간찰첩이다. (전남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https://lib.jnu.ac.kr/)에서 원본 이미지 열람 가능) 천(天)ㆍ지(地)ㆍ인(人) 3첩(帖)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96통의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모두 사위인 민유중(閔維重, 1630~1678)에게 보낸 것인데, ‘천첩’에는 민유중의 형 민시중(閔蓍重)과 민정중(閔鼎重)이 함께 받은 편지도 일부 있다. ‘천첩’은 1660년(현종 1), ‘지첩’은 1666년, ‘인첩’은 1670년에 쓴 편지를 수록했다.

 

  민유중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 지숙(持叔), 호 둔촌(屯村)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준길의 차녀와 혼인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낳은 차녀가 숙종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가 되어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651년 문과에 합격하고, 승문원을 거쳐 이조 정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했다. 전라도ㆍ충청도ㆍ평안도의 관찰사 등 주요 외직도 두루 거쳤다. 숙종 즉위 후 남인이 집권하자 흥해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ㆍ호조ㆍ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했다. 1681년 국구(國舅)가 된 후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금위영 창설을 주도하며 병권을 관장했다. 국구로서 병권과 재정권을 독점한다는 비판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자택에서 머물다가 1687년 58세로 사망했다.

 

  민유중은 동춘선생수찰에 수록된 편지가 쓰인 시기 중 1660년에는 교리(校理)로 비교적 지위가 높지 않았지만, 1666년에는 전라도 관찰사, 1670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당상관으로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송준길과 민유중은 장인과 사위 사이로서 동춘선생수찰 수록 편지들은 분명 가족 간에 주고받은 사적인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보면 송준길은 민유중을 무척 정중하게 대하고 있고 때로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대하기도 하는 등, 편지의 예법ㆍ어법ㆍ어투에서 모두 사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족이나 일가친척의 아랫사람 혹은 가까운 친우라도 편지 수신자가 지위가 높으면 존대를 한 경우를 꽤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춘선생수찰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편지 예법을 살펴볼 수 있는 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둘은 모두 정치ㆍ사회적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편지에는 당대의 고급 정보가 많이 담겨 있어 사료로서 갖는 의의 또한 작지 않다. 따라서 전남대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은 내용과 표현 그리고 글씨 면에서 모두 가치 높은 자료라 평가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 간찰첩 가운데 ‘지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지첩(地帖)’에는 모두 31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이 쓰인 1666년(병오, 현종 7)에 송준길은 61세였고 민유중은 37세였다. 민유중은 전해인 1665년 2월 13일에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송준길은 1665년 5월에 우참찬이 되었으나 10월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고, 1666년 1월에는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체차되었다. ‘지첩’의 편지들은 모두 1666년 3월과 4월에 쓰인 것으로서, 3월의 편지가 11통(별지 2매 포함)이며 4월의 것이 20통이다.

 

  이 편지들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현종과 자전(慈殿) 즉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온행(溫幸)’ 즉 온양온천 행행(行幸)이다. 현종은 3월 26일에 거둥하여 4월 27일에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출발하기까지 약 한 달 동안 온양행궁에 머물렀다. 송준길은 상(上)의 온양 행차가 임박했다는 것을 3월 초 편지부터 언급하기 시작하여, 행차 날짜가 결정되었다는 소식, 상과 자전의 온천욕 상황, 서울로 떠나는 환궁 날짜의 결정, 그리고 환궁의 행정(行程)까지 일련의 소식을 편지로 자세히 전하고 있다. 특히 온양에 온 현종이 인근의 주요 인사인 송시열ㆍ송준길ㆍ이유태ㆍ윤선거 등을 불러 만나고자 사관(史官)을 보내 소지(召旨)를 전했기 때문에, 송준길은 행궁에 가서 현종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현종의 소대(召對)를 전후한 기간 동안 그는 더욱 자주 편지를 써서 당시 정황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특히 첫 면대 이후 24일부터 27일까지는 하루에 2통씩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서 송준길은 온천욕을 청해 허락을 받아 손자와 함께 목욕을 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2품 이상의 고관(高官)은 온천욕을 위한 휴가를 청할 수 있었으며(은대조례 이고(吏攷) 정사(呈辭) 및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정사식(呈辭式) 등 참조), 관련 기사가 실록 등 사서(史書)에 종종 등장하고 문집에 목욕(沐浴) 휴가를 청하는 상소문이 실려있기도 하다. 그러나 행궁에서 면대(面對)를 통해 직접 온천욕을 청한 예는 보기 힘들며, 목욕 전후의 사정을 본인이 직접 진술한 자료는 더욱 드물다. 사직한 상태였으나 유현(儒賢)으로 존중받던 고관이었던 송준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자체로 이례적 사건이었던 국왕의 온천 행행을 둘러싼 전후 사정을 정식 사서가 아닌 다른 기록에서 이토록 자세히 다룬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동춘선생수찰에 수록된 편지들은 매우 다양한 사연을 담고 있지만, 이 사례 하나만로도 이 간찰첩이 얼마나 귀한 기록 문화 유산인지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지첩’에 수록된 31통의 편지 중 7통(본문 7장 및 별지 1장)을 선별하여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1]

曾是不意, 承此三九書, 喜聞還營在邇, 起居佳勝, 欣慰之至, 不可容喩. 卽今其已還營也否? 此間病攻虎■, 百端在中. 溫幸之期又漸迫, 憂慮尤不勝耿耿. 嶺疏之入, 想有日, 不知有何指揮, 大關時運, 難容人力, 靜竢之而已. 交代之■■■, 其故何耶? 殊怪殊怪. 千萬姑不宣, 謹復.

丙三月十二日, 浚吉.

 

정말 뜻밖에도 3월 9일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감영으로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았으며 잘 지내고 계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히 기쁘고 마음이 놓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감영으로 돌아가셨는지요?
저는 안팎으로 모두 침범을 당하여* 마음속에 갖가지 생각이 드는 와중에 온양온천 행행(行幸)의 시일까지 점차 닥쳐오니, 걱정과 염려를 더욱 금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면 영남 유생의 상소**가 들어올 텐데, 주상전하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시운(時運)과 크게 연관된 것이어서 사람의 힘으로 어쩌기 어려운 것이니 조용히 기다릴 뿐입니다.
체직 명령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으니, 까닭이 무엇입니까? 무척 이상합니다.
드릴 말씀 많으나 일단 이만 줄이며, 삼가 답장 드립니다.
병(丙: 병오년. 1666년) 3월 12일, 준길.

 

*안팎으로 모두 침범을 당하여: 원문은 ‘병공호식(病攻虎食)’이다. 이 말은 『장자(莊子)』 「달생(達生)」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전개지(田開之)가 주 위공(周威公)에게 말하길, ‘제가 스승에게 들으니,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이하여 그 뒤떨어진 놈을 보고 채찍질을 가한다고 했습니다’(聞之夫子曰, 養生者, 若牧羊然, 視其後者而鞭之)라고 하자, 위공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전개지가 대답하기를, ‘노나라의 선표란 사람은 바위 굴에 은거하면서 물만 마시고 속세의 이끗을 다투지 않아 나이가 칠십이 되어도 마치 어린아이 같았는데 불행히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혔고, 장의란 사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두루 쫓아다니며 명리를 얻기에 급급했는데 나이 사십에 속으로 열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표는 안으로 정신만 기르다가 호랑이가 몸뚱이를 잡아먹었고, 장의는 밖으로 몸뚱이만 기르다가 열병이 그 안을 침범한 것이니,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뒤떨어진 놈을 채찍질하지 못한 것입니다’(魯有單豹者, 巖居而水飮, 不與民共利, 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 不幸遇餓虎, 餓虎殺而食之, 有張毅者, 高門縣薄無不走也, 行年四十而有內熱之病以死. 豹養其內, 而虎食其外; 毅養其外, 而病攻其內. 此二子者, 皆不鞭其後者也.)라고 답했다.”
**영남 유생의 상소: 소두(疏頭) 유세철(柳世哲) 등 경상도 유생 천여 명이 합동으로 올린 상소를 가리킨다. 상소의 전문은 『조선왕조실록』 현종7년(1666) 3월 23일 기사에 실려있다. 이들은 선왕인 효종이 승하한 후 입었던 상복인 ‘기해년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논증하며, 복제 논의를 주도한 송시열을 비판하였다.  
 

 

이 편지의 주요 용건은 세 가지다. 우선 온행 날짜가 닥쳐왔음을 이야기했고, ‘영소(嶺疏)’ 즉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처분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걱정했다. 그리고 ‘교대(交代)’ 즉 편지를 받는 전라도 관찰사 민유중의 후임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능행(陵幸) 등 국왕의 행차 때 인근 도의 관찰사가 해당 도의 경계에서 기다려 맞이하여야 하는 등 관찰사의 업무가 늘어나며, 송준길 자신 또한 소명(召命)에 대비해야했다. 이 때문에 민감한 현안인 온행에 대해 걱정을 표한 것이다.

  당시 민유중은 감영을 떠나 순행(巡行)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감영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음을 언급했다. ‘감영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환영(還營)’의 주체는 편지를 받는 상대방이기 때문에 존중의 뜻에서 앞에 한 글자를 비우는 간자(間字) 혹은 행을 바꾸는 개행(改行)을 했다. (본문 제2행과 제5행) 주체가 국왕일 경우는 더욱 깍듯한 예법을 갖췄다. ‘온행(溫幸)’(본문 제7행 제1ㆍ2자)의 대두(擡頭)와 ‘지휘(指揮)’(본문 제9행 제6ㆍ7자)의 간자는 일견 ‘還營’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溫’은 제5행의 ‘還’보다 위치가 약간 더 높고, ‘指’ 앞의 공간은 제2행의 ‘還’보다 더 크다. 설사 실제 물리적 위치 및 공간에서 별 차이가 없다 해도, 원래 이루어졌어야 할 형식이 지면의 제약 등으로 인해 충분히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 첫 글자인 ‘증(曾)’의 주획(主畫)에서 살짝 보인 위로 솟아 둥글게 굽은 가로획의 동세는, 제4행 제2자의 ‘용(容)’, 제5행 제2자 ‘영(營)’과 제3자 ‘야(也)’, 제6자 ‘간(間)’, 그리고 제5행 제2자인 ‘단(端)’ 등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 대들보 획들은 왼쪽 아래가 길게 쳐져 크게 기욺으로 인해 안정감보다는 유려하고 활달한 움직임의 느낌이 더 강하다. 종이의 가운데 부분에서 ‘容’, ‘營也’, ‘端’이 모여 이룬 동세의 집합은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2]

[피봉]

湖南巡相 節下

省式              [花押] 謹封

令前 答狀上

溫幸以今卄六爲定云, 已聞之否?

[본문]

承拜前後令札, 細審示意, 益受各鍾珍貺, 驚感無已. 此間僅僅支過, 生意索然. 溫幸漸迫, 頌祝之誠, 憂厲之懷, 有不可形喩者. 過用精力而致傷者, 吾見多矣. 以此每爲令憂之. 日間須以省簡■息爲務, 豈勝幸甚? 適客至, 潦草不宣, 謹謝.

丙三月十九日, 浚吉.

 

[피봉]

전라도 관찰사 절하(節下) 영감 앞에 답장 올림

생식(省式)                                [화압] 삼가 봉함

온양온천 행행은 이달 26일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이미 들으셨는지요?

[본문]

영감께서 앞뒤로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하신 말씀을 상세히 알게 되었고, 각종 진귀한 선물까지 받아, 놀랍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저는 근근이 버티고 지내며, 살고 싶은 의욕이 전혀 없습니다.

온양온천 행행이 점차 다가오니, 칭송하며 경하하고픈 마음과 걱정되는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정신과 힘을 지나치게 쓰다가 몸을 상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매번 영감을 걱정합니다. 며칠이라도 덜어내고 간략히 하여 휴식에 힘쓴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마침 손님이 와서 대략 쓰며 이만 줄입니다. 삼가 답장 드립니다.

(: 병오년. 1666) 3 19, 준길.

 

앞의 편지로부터 7일 후에 쓴 편지다. 이 편지는 첩장(帖裝)할 때 오른쪽에 배접하여 붙인 피봉이 중요하다. 피봉에 ‘호남(湖南) 순상(巡相) 절하(節下) 영전(令前)’에 답장을 올린다고 썼다. ‘호남 순상’은 전라도 관찰사를 가리키고, ‘절하’의 ‘절’은 절기(節旗) 즉 사신의 깃발을 가리키는 말로서 편지의 피봉에서 관찰사를 대칭(代稱)하여 쓰는 말이며, ‘영전’은 ‘영감 앞’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수신자를 가리키는 통상적인 말을 쓰고 화압(花押) 및 ‘생식(省式) 근봉(謹封)’까지 적은 후 아래의 공백에 작은 글씨로 “溫幸 以今卄六爲定云 已聞之否”(온양온천 행행이 이달 26일로 정해졌다는데, 이미 들으셨는지요)라고 13자를 덧붙였다. 이것은 “마침 손님이 와서” 초솔(草率)하게 편지를 쓴 후, 잊고 있던 가장 중요한 정보인 국왕의 온천 거둥 날짜를 적어 넣은 것이다. (이 손님에게 들은 것일 수도 있다.) 현종실록 3월 13일 기사에 온천 거둥 날짜가 26일로 정해졌다는 기록이 있음을 감안하면, 해당 소식이 6일 만에 회덕의 송준길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손님이 오고 나서 대략 쓴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자형(字形)에 흐트러짐이 없고 필획 또한 생생하며 힘차서, 송준길의 평소 필력을 여실히 볼 수 있다. 
 
[3]

[추신1]

偶閱退陶與人書云, 平生未嘗有求於人, 近因石役切迫, 不免求數石炭於縣官, 極用愧歎云云, 令人不勝激昻. 以退陶所操, 則雖於令必無所求, 而吾則有求於令, 前後不知其幾, 黃鵠壤蟲, 豈不愧且愧耶?

[추신2]

碧堤事, 良幸. 交代已出耶? 深企深企.

[추신3]

尹婢事, 其所切願, 只在於其兒婢之捉使, 而今聞不爲率現云. 極用憤痛. 其婢夫妻, 罪實可殺, 須各嚴刑. 雖不囚之, 而督令率現, 至望至望.

[추신4]

宣化堂三大字, 强作以副, 甚不似, 可愧可愧. 餘紙亦有所寫去者, 而尤拙矣.

 

[추신1]

우연히 퇴도(退陶) 선생(퇴계 이황)이 어떤 사람에게 준 편지를 읽었는데, 거기에 평생 남에게 무언가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 근래 석역(石役)이 매우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현()의 수령에게 숯 몇 섬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지극히 부끄럽고 안타깝다.’라는 구절이 있어, 읽고서 정신이 번쩍 듦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퇴도 선생과 같은 몸가짐이라면 반드시 영감께 요구함이 없었을 터이지만, 나는 전후로 셀 수 없이 영감에게 요구했으니, 하늘 높이 나는 고니와 땅을 기어다니는 벌레와 같은 차이에 어찌 부끄럽고 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추신2]

벽제(碧堤)의 일*은 정말 다행입니다. 영감의 체직 명령은 이미 나왔습니까? 깊이 기대됩니다.

[추신3]

윤 비(尹婢)의 일은, 그녀의 소망이 오로지 아비(兒婢)를 붙잡아 와서 부릴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는데, 지금 들으니 데리고 현신(現身)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극히 분통스런 일입니다. 윤 비 부부의 죄는 실로 죽일 만하니, 반드시 각기 엄히 처벌해야 합니다. 잡아 가두기까지는 하지 않는다 해도, 데리고 현신하도록 독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신4]

선화당(宣化堂)’ 세 큰 글자를 억지로 써서 요청에 부응합니다만, 매우 볼품없어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나머지 종이에 써서 보낸 글씨 또한 매우 졸렬합니다.

*벽제(碧堤)의 일: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벽제는 김제군(金堤郡)의 별칭이므로, 김제군수의 체직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앞 편지의 별지(別紙)이다. 별지이므로 앞뒤의 인사말 없이 용건만 죽 적었다. 한 용건이 끝난 후 다음 용건은 행을 바꿔 썼다. 모두 4개의 용건을 썼는데, 이 가운데 첫 번째와 마지막 네 번째 사연이 볼 만하다. 첫 번째는 석역(石役) 즉 묘소의 석물을 설치하는 공사 때문에 민유중에게 여러 차례 신세를 진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토로했다. 송준길은 평소 퇴계 이황을 깊이 존경했다. 따라서 퇴계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처신을 자책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민유중의 부탁으로 ‘선화당’ 편액을 써서 준 일을 언급했다. 달필이었던 송준길은 평소 글씨 부탁을 많이 받았다. 선화당은 관찰사가 집무하던 정당(正堂)을 가리킨다. 이 별지를 통해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사위 민유중의 부탁으로 전라감영 선화당의 편액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송준길이 쓴 이 현판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언급은 전라감영의 역사를 위한 소중한 기록이 된다.
 

  별지는 예를 차리지 않고 용건만 적은 것이므로 평소의 글씨가 더욱 잘 드러난다. “黃鵠”부터 시작하는 제6행 및 “碧堤”로 시작하는 제7행 부분에서 중봉을 지키고 먹색이 또렷한 힘 있는 필획의 글씨를 잘 볼 수 있다.

 
[4]

[본문]

前覆已照否? 卽惟令客況平安否? 戀戀. 吾卽聞, 承旨又承命將至, 驚惶罔知所措. 到此地頭, 情勢之不安, 疾病之難强, 同異之爲嫌, 皆不暇顧. 明早扶舁登道, 狼狽悶迫之狀, 不可形說, 敢此耑告. 且前去千翼, 趁送於溫陽爲佳. 吾行度於卄三朝到溫矣. 只此.

四月卄朝, 浚吉.

[추신]

生薑爲兒病, 欲優得之.

 

[본문]

전에 보낸 답장은 보셨습니까? 영감은 객지에서 평안합니까? 매우 그립습니다.

내가 지금 들으니, 승지가 왕명을 받들고 올 것이라고 합니다.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고 보니, 불안한 상황과 몸 가누기 힘든 병과 처신의 다름에 따른 혐의 등등을 모두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병든 몸을 이끌고 길을 떠날 것인데, 고민스럽고 급박한 낭패스러운 모습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감히 이렇게 전인(專人)*을 보내 고합니다. 전에 보낸 철릭도 때에 맞추어 온양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23일 아침에 온양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4 20일 아침, 준길.

[추신]

아이의 병에 쓸 생강을 넉넉히 얻고자 합니다.

*전인(專人): 원문은 전인(耑人)’이다. ‘()’ ()’과 같다. 편지를 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일부러 보낸 심부름꾼을 가리킨다.

 

  온양온천 행궁에 온 현종은 본래 목적인 온천욕 이외에 별시(別試)를 시행하고 지역의 유현(儒賢)을 만나보는 등 지역민을 위무하기 위한 정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송준길에게도 승지를 파견하여 소명(召命)을 전했다. 동춘당일기병오년(1666) 4월 20일 기사에 좌승지 김 하경(金夏卿)이 왕명을 받들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경은 김우석(金禹錫)의 자(字)이다. 이때를 전후한 편지들에서 진퇴(進退) 즉 소명에 응하여 나아갈 것인가, 혹은 사양하고 가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당시 송준길은 세 차례 사관 혹은 승지를 통한 소명을 받았다. 이 편지에서 송준길은 드디어 다음날 온양 행궁으로 출발하기로 했음을 알리고 있다. 

 

  원문의 ‘천익(千翼)’은 철릭을 가리킨다. 철릭은 ‘천익(天翼, 千翼)’ 혹은 ‘첩리(貼裏, 帖裏)’ 등으로 표기했으며, 군복으로 입었던 관복으로서 사냥ㆍ행행(行幸) 시에도 착용했다. 승정원일기 현종6년(1665) 4월 9일 기사에 오례의(五禮儀) 및 등록(謄錄)을 참조하면서 온양 행행 시의 절목(節目)에 대해 대신들과 상의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위장사(侍衛將士)의 복색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현종 대에 온행(溫幸)이 잦았으므로 온행 절목도 점차 갖추어져 갔을 것으로 보인다. 비변사등록 숙종43년 2월 ‘온천 거둥 시 각 관사에서 행해야할 절목[溫泉擧動時各司應行節目]’을 보면, 국왕 및 왕세자, 유도백관(留都百官), 배종백관(陪從百官), 시위장사 등은 모두 융복(戎服) 즉 군복을 착용하라고 한 규정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융복은 기본적으로 철릭을 착용했다. 따라서 여기에서 송준길은 온천에 와있는 현종을 만날 때 입을 철릭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철릭을 이전에 민유중에게 보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글씨는 특히 큼직큼직하고 시원스럽다. 굵고 또렷한 획, 왼쪽 아래로 거침없이 기운 동세, 물 흐르듯 이어진 운필(運筆), 그러면서도 법도를 잘 지킨 자체(字體) 등에서 송준길 행초서의 진수를 볼 수 있다. 

 

[5]

[본문]

一日四書, 欣慰十分. 僕作行第三日, 今午入謝, 卽蒙賜對, 天顔溫粹, 語意懇惻, 感激之衷, 有不可以言語筆札形之也. 末終以隨行之意懇懇下敎, 對以今日始得赴謝, 逋慢之罪方深, 何敢遽陳情勢縷縷多言耶, 當於後日仰達. 且問尤家病患甚懇, 令人感泣矣. 悤悤只此.

卄三夜, 病旅.

[추신]

惠物皆依到.

 

[본문]

하루에 네 통의 편지를 보내주시니, 한껏 기쁘고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길 떠난 지 사흘째인데, 오늘 오시(午時)에 행궁으로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곧바로 주상전하를 뵐 수 있었습니다. 천안(天顔)이 온화하고 깨끗하였고, 진심 어린 말씀도 주셨으니, 감격스러운 마음을 필설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수행(隨行)하라는 말씀을 정성스레 내려주시기까지 하여, ‘오늘에야 비로소 와서 사은했으니 게으름을 피우다 늦게 온 죄가 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찌 감히 지금 갑자기 여러 말을 늘어놓으며 제 형편을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마땅히 나중에 진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암(尤菴) 대감 집안의 병환에 대해 매우 정성스레 하문하시기도 하여, 저를 감읍하게 했습니다.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23일 밤, 병려(病旅).

[추신]

보내주신 물건들은 모두 잘 도착했습니다.

 

  현종의 온양 행행은 당시 가장 큰 공적 현안이었고, 소명에 대한 송준길의 부응 여부는 장인과 사위 사이의 시급한 사적 관심사였다. 따라서 이 시기 이 두 사람은 하루에도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낼 만큼 빈번하게 연락하며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송준길은 21일에 회덕의 집에서 출발하여 3일째인 23일 낮에 온양 행궁에 도착하여 입대(入對)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어렵사리 상(上)을 마주한 감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편지는 중반 이후 획이 흐리거나 비백이 있으며 글씨 사이의 연면도 많아서, 다소 급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6]

[피봉]

湖南伯 行軒

                             [花押]

[본문]

承慰承慰. 留蹕加浴, 實甚合宜, 而卽今事勢, 有不能然者, 慨慮不可言. 明間倘蒙賜對, 則當陳情乞浴, 不能則擬上箚耳. 姜公事, 不能詳記其始末, 可細示否? 然恐不可及, 他日令公入侍陳白爲宜耳. 小學事, 吏判適在坐, 同見別紙, 以栗谷所集, 改小註爲大字, 幷刊諺解, 甚好甚好. 此在道臣造化, 何必啓施耶? 餘姑不宣.

卄五夕, 病旅.

[추신]

所送依到.

[피봉]

전라도 관찰사 행헌(行軒)

                                           [화압]

[본문]

편지를 받고 매우 마음이 놓입니다.

주상전하께서 계속 머무르며 온천욕을 더 하심이 실로 합당하나, 지금 형편상 그럴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개탄스러움과 염려를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내일쯤 주상전하를 뵐 수 있다면 저의 온천욕을 청할 것인데, 그럴 수 없다면 차자(箚子)를 올릴 계획입니다.

() ()의 일은, 그 전말을 상세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마도 때에 맞출 수 없을 듯하니, 나중에 영공(令公)께서 입시할 때 진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소학(小學)* 문제는, 이조 판서가 마침 그 자리에 있어 함께 별지를 보았습니다. 율곡(栗谷)이 모은 소주(小註)를 큰 글씨로 고치고 아울러 언해를 함께 간행하면 매우 좋겠습니다. 이는 관찰사가 하기 나름이니, 굳이 상주하여 시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25일 저녁, 병려(病旅).

[추신]

보내주신 물건은 다 제대로 왔습니다.

*소학(小學): 율곡 이이가 편찬한 소학제가집주(小學諸家集註)를 가리킴

 

  송준길이 소명에 응하여 온양 행궁에 가서 현종을 마주한 시점은, 현종이 체류를 거의 끝내고 도성으로 돌아가는 행차를 앞둔 때였다. 송준길은 상(上)의 “유필가욕(留蹕加浴)” 즉 계속 머무르며 더 목욕할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한 후, “걸욕(乞浴)” 즉 자신의 목욕을 청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고관을 지낸 인사가 온천 행궁에서 국왕을 만나 자신의 온천욕을 청한 사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는 부분이다.

 

  송준길의 글씨가 달필이라는 느낌을 주는 요인으로 변화가 풍부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글자 크기 및 획의 굵기 등에서 적절히 낙차를 주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 편지는 중반부에서 다소 가는 획의 글씨를 구사하고 있는데, 본문 제6행 첫머리의 “擬上箚耳”에서는 종지의 어사인 ‘이(耳)’를 굵고 길게 써서 변화를 주고 있다.

 

[7]

[피봉]

湖南伯 行軒

                         [花押]

[본문]

昨夕書照否? 連見書, 如對之慰不可言. 今日雨勢如許, 回鑾待晴■或■難必, 凡百可慮耳. 僕將久留此, 而雖許浴, 正湯則有所不敢, 此論頗行, 事甚難處, 未知如何如何. 不宣只此.

卄七朝, 病旅.

[추신]

保元散, 甚奇味, 恨得之之晩耳. 聞金河西曾未有褒贈之典云, 信否?

 

[피봉]

전라도 관찰사 행헌(行軒)

                                                [화압]

[본문]

어제저녁에 보낸 편지는 보셨는지요? 연이어 보내주신 편지를 받으니, 마치 직접 만난 것처럼 위로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비가 어지간히 내리므로, 대궐로 돌아가는 주상전하의 행차는 날이 맑기를 기다렸다가 떠날 예정입니다만, 기필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일이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저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것입니다. 목욕을 허락받기는 했으나, 감히 정탕(正湯)에서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논의가 퍼져 심히 난처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27일 아침, 병려(病旅).

[추신]

보원산(保元散)은 매우 기특한 약입니다. 늦게 얻은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들으니, 김 하서(金河西: 김인후)가 포증(褒贈)하는 은전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입니까?

 

  이날은 원래 현종의 환궁 행차가 출발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마침 아침에 비가 내려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송준길은 전날 온천욕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정탕(正湯)”에서 목욕하라는 허락을 받긴 했어도, 감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탕은 아마도 국왕이 목욕하는 탕실(湯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오른쪽 아래에 추신 4행을 덧붙였다. 이 부분은 매우 빠른 속도로 쓴 것으로 보인다. 첫머리의 “保元散甚” 4글자, 다음의 “奇味” 2글자, 다음 행의 “得之之晩耳” 5글자는 모두 글자 사이를 이어서 쓴 연면이 돋보인다. 송준길의 운필은 보원산이라는 약에 대해 언급하는 지극히 평범한 편지 문장을 꽤 볼 만한 행초서 서예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8]

[피봉]

湖南伯 行軒

[본문]

朝書照否? 昨者旣蒙聖敎留浴, 而玉堂■箚, 致有遣知■…■之擧, 不獲已■■■安矣. 方擬留此陳■, 又不知前頭有何人事爲慮. 尤台則將向稷落後云. 路次悤撓只此.

四月卄七午, 病旅.

[추신]

雨霽後巳時動駕, 今則天安將向稷山矣.

 

[피봉]

전라도관찰사 행헌(行軒)

[본문]

아침에 보낸 편지는 보셨습니까? 어제 주상전하의 하교를 받고 머물러 목욕했는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 () 부득이 () 이곳에 머무르며 상소를 올릴 계획입니다만, 앞으로 어떤 일이 있게 될지 몰라 걱정입니다. 우태(尤台: 송시열)는 직산(稷山)으로 갈 것인데 뒤로 처졌다고 합니다.

여정 중에 머무르며 바쁘고 정신이 없어 이만 줄입니다.

4 27일 오시(午時), 병려(病旅).

[추신]

주상전하는 비가 갠 후 사시(巳時)에 거둥하셨습니다. 지금은 천안(天安)에 계시며, 직산(稷山)으로 향할 것입니다.

 

  마침 비가 개어 현종 일행은 예정대로 환궁 행차를 출발할 수 있었다. 송준길은 현종의 명으로 어가 행렬을 수행했다. 이 편지는 수행 행차 중에 급하게 쓴 것이다. 종이가 군데군데 해진 곳이 있어 판독이 힘든 글자가 많다. 그래도 전날 송준길이 결국 온천욕을 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일련의 편지들을 통해, 현종의 온양 행궁 행차부터 도성 환궁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을, 가까운 곳에서 전해 듣고 또 직접 행궁으로 가서 현종을 만나고 목욕까지 한 송준길의 목소리를 통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었다.

 

  이 편지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매우 거칠다. 종이의 질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여행지에서 급하게 쓰느라 그랬을 것이다. 마지막의 “路次悤(忩)撓只此” 등에서 보이는 거친 비백(飛白)은 송준길의 평소 글씨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여정 중 머무른 곳에서 바쁘게 쓴다.’는 내용만큼이나 글씨 또한 바쁘다. 송준길 글씨 중 별격에 해당한다 하겠다.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은 동춘당 송준길이 민유중에게 준 편지를 모은 간찰첩이다. 송준길과 민유중 모두 사회적 지위가 상당했기에 비교적 고급의 정보가 많이 포함된 일급의 사료인 동시에, 장인이 사위에게 준 편지이므로 가족 간 내밀한 이야기나 다정한 보살핌의 사연도 다수 있어서 읽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무엇보다 상당한 달필이었던 송준길의 행초서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내용과 형식 모두 뛰어난 가치를 자랑하는 이 간찰첩은 주목의 가치가 충분하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글쓴이  :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실 승정원일기번역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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