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백광욱 2025. 10. 2. 16:46

 

 

맑은 일과[34가지 일]
향 사르기, 차 달이기, 낮잠, 밤에 책 읽기, 문장 비평, 책 쓰기, 시 짓기, 그림 그리기, 전각(篆刻), 운자(韻字) 뽑기, 거문고 연주, 바둑, 활쏘기, 투호, 검(劍) 감상, 거울보기, 물고기 기르기, 학 길들이기, 폭포 소리 듣기, 산책, 꽃 심기, 대나무 옮겨심기, 샘물 마시기, 소나무 돌보기, 연꽃 감상, 국화 따기, 채소 뜯기, 과일 줍기, 정원에 물 뿌리기, 눈 쓸기, 더위 씻기, 시원한 곳 가기, 햇볕에 약 말리기, 환약 조제.

 

淸課[三十四事]
焚香, 煑茗, 午睡, 夜讀, 論文, 著書, 作詩, 作畫, 鐫籀, 射韻, 鼓琴, 圍碁, 射帿, 投壺, 觀劒, 覽鏡, 養魚, 調鶴, 聽瀑, 踏靑, 種花, 移竹, 汲泉, 撫松, 賞蓮, 掇菊, 挑蔬, 拾菓, 灌園, 掃雪, 濯熱, 就凉, 曬藥, 調丸.

청과[삼십사사]

분향, 자명, 오수, 야독, 논문, 저서, 작시, 작화, 전주, 사운, 고금, 위기, 사후, 투호, 관검, 남경, 양어, 조학, 청폭, 답청, 종화, 이죽, 급천, 무송, 상련, 철국, 도소, 습과, 관원, 제설, 탁열, 취량, 쇄약, 조환.

 

장혼(張混, 1759~1828), 『이이엄집(而已广集)』 「평생지(平生志)」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낮밤이 뒤바뀐 채 살았다. 오후 1시쯤 일어나 연구소나 도서관으로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와 일출을 보고 잠들곤 했다. 수면 패턴을 되돌려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모국에서 시차증을 앓는 흔치 않은 경험만 하며 거듭 실패했다. 의지박약이 원인이었겠지만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보다는, 차라리 시차가 6시간 쯤 나는 나라에 가서 살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만 했다. 물론 그 나라에 가면 또 그곳 시간대에 맞춰 낮밤이 뒤바뀌겠지만 말이다. 이후에 취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낮밤은 제자리를 찾았다. 월급은 힘이 세다. 
 
  사람은 누구나 잠을 자지만 잠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르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운 사람도 있고 자고 싶은데 못자는 사람도 있다. 잠은 죽어서 실컷 잘 수 있다는 사람도 있는데 재밌게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잠의 신 힙노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형제라고 생각했다. 남들 잘 때 자지 않고 남들 자지 않을 때 자는 사람도 있다.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 밤에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등등. 
 
  장혼은 ‘평생의 지향’이라는 제목의 위 글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의 입지와 구조, 조경 등을 길게 서술하고 부록으로 그 집에서 자신이 누리고 싶은 ‘맑은’ 것들을 열거하였는데 그중 맑은 일과[淸課] 34가지 중 하나가 낮잠이었다. 공자는 낮잠을 자는 제자를 보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지만, 옛 사람들의 시에는 낮잠을 자거나 자고 일어난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장혼은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낮잠을 들었다. 
 
  낮잠은 남들 깨어 있을 때 자는 것이라는 점에서 남들 잘 때 깨어 있는 불면과 반대이다. 하지만 옛 사람들의 심상에서 이 둘은 통하는 데가 있다. 불면은 아무도 세상의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깨어 근심하는 뜻 있는 선비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뜻 있는 선비는 백주대낮에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부박한 천태만상을 위기의 조짐이나 증상으로 보기도 한다. 속세의 사람들이 돈, 명예, 권력 등 욕망을 채우려 눈을 부릅뜨고 돌아다닐 때 홀로 문을 닫아걸고 눈을 감아 세상과의 연결을 잠시나마 차단하는 것이 낮잠이다. 옛날 사람들은 더러운 흙먼지를 뜻하는 ‘진(塵)’을 속세를 의미하는 말로 썼다. 그런 의미에서 속세와 자신을 격리하는 낮잠은 ‘맑은’ 일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꼭 낮잠이 아니더라도 잠을 현실과의 분리로 보는 발상은 동서고금에 보편적인 듯도 하다. 일례로 『돈키호테』에서 산초는 잠을 자지 않는 돈키호테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제가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잠들어 있는 한 모든 두려움과 희망, 고난과 영광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죠! 아, 잠을 발견한 이에게 영광 있으라!
 
  요즘 사람들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큰 이유 중에는 스마트폰이 있다. 정확히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접속하는 SNS, 유튜브 등이 원인이 된다. 늦은 밤에도 항상 세상과 연결을 유지하고 있으니 세상과의 격리인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잠이 죽음과 비슷하다지만 결국 죽음은 아니다. 잠을 잘 자야, 그러니까 적당한 때에 현실 세상으로 이어진 선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연결해야 우리는 이 속세를 맑은 정신으로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글쓴이   :  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