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턱에서
무심히 문득 나를 내려놓으니
나를 미혹하는 일 더 이상 없네
연밭에 이슬 미끄러져 내리더니
난초 잎은 가을에 먼저 시드네
풀벌레 소리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산을 머금은 달그림자 외롭네
흰 갈매기와 옛 약속 지키러
다시금 강호에 돌아와 앉았노라
마음속 천근만근 근심도
맑은 밤엔 한 점 남아 있지 않네
바로 세속의 때 씻어낼 수 있으니
영고성쇠를 어찌 따지고 싶으랴
학이 잠들자 섬돌 더욱 깨끗하고
구름 깃드니 골짜기 외롭지 않네
연꽃 핀 십 리에 달빛 비추고
가을 생각은 남쪽 호수에 가득하구나
嗒然忽忘吾 탑연홀망오
妄吾事更無 망오사갱무
荷叢露已滑 하총로이활
蘭葉秋先枯 난엽추선고
繞壁蟲聲亂 요벽충성란
含山月影孤 함산월영고
白鷗舊時約 백구구시약
仍復在江湖 잉부재강호
萬斛胷中事 만곡흉중사
淸宵一點無 청소일점무
正能疏濯淖 정능소탁뇨
豈欲辨榮枯 기욕변영고
鶴睡堦還凈 학수계환정
雲藏洞不孤 운장동불고
荷花十里月 하화십리월
秋思滿南湖 추사만남호
- 조면호(趙冕鎬, 1803~1887), 『옥수집(玉垂集)』 「초가을[初秋]」
전국 곳곳에서 최장 열대야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 여름, 이제 제법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도 불어오고 어느덧 가을이 성큼 찾아왔다. 지구열대화의 시대에 올해와 같은 힘든 여름은 연례행사처럼 찾아올 것이기에 시원한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은 해가 갈수록 더욱 간절할 것 같다.
19세기 서울 북촌에서 시단(詩壇)을 주도했던 조면호 역시 가을을 소재로 많은 시를 남겼다. 시인의 시대엔 지금만큼 가을이 절실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청량함과 쓸쓸함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자아내는 가을은 시인에게 시상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계절이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가을밤 고즈넉한 정취를 잘 묘사하였다. 작열하던 태양이 숨을 고르고 공활한 하늘 아래 서늘한 바람 불어오면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달밤이 찾아온다. 풀벌레 여전히 사방에서 찌르르 울어대지만 깊은 산속 어둠을 밝히는 달빛은 홀로 고요하기에 더욱 선명하다. 한낮의 복잡다단하던 근심도 조용한 달밤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면 까만 밤처럼 아득히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갈매기와의 약속’은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시에 나온 말로 강호에 은둔하여 한가롭게 살려는 뜻을 말한다. 조면호가 불과 21세 되던 해에 이 시를 지었고 이후 여러 환로에 두루 진출한 것을 감안하면 세상 명리를 초탈하여 은거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세상 근심에 초연한 듯한 자세를 내보이는 것은 청명한 가을에 기대어 한창의 혈기에 일어나는 온갖 상념들을 잠시 달래보려는 의도는 아닐까.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것은 그저 사계절의 반환점을 돌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봄여름의 분주했던 일상들을 차분히 정리하고 잘 갈무리할 시간이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을만의 서늘하고 깨끗한 밤이 찾아오면 가끔은 세상일을 잊고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가져봐도 괜찮을 듯하다. 뜨거운 여름에 미뤄두었던 일상을 다시 마주하고, 다가오는 추석 명절에 반가운 이들과 정담을 나누며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것도 가을만의 기분 좋은 갈무리가 될 것 같다.
글쓴이 :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교육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사람의 사투리 (1) | 2024.10.23 |
---|---|
명당과 발복 (4) | 2024.10.04 |
바로, 오늘이다 ! (0) | 2024.09.10 |
범 같은 정의 (1) | 2024.09.02 |
바다의 붉은 재앙, 적조(赤潮) (1) | 2024.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