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음을 전폐하며 입학한 호주대학, 그 과정을 이야기 하다
나의 호주 생활의 시작이었던 워킹홀리데이에 이어 시작된, 나의 호주 대학 입학 과정을 풀어 보겠다. (Written by 여울)
“굳이 타이틀을 쫓지 않아도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고 그걸 찬찬히 밟는다면 자연스레 원하는 걸 얻게 된다는 인생의 교훈을 깨달았다. 사회가 바라는 이상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해 준 그때 그 상황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호주 멜버른에 있는 RMIT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디지털 미디어를 공부했다. 나의 입학 과정을 설명하자면 책 반 권 분량이 나올 정도로 이야기가 길고 진부하다. 그만큼 험난했으며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고 식음 전폐하며 한국에 돌아갈 위기까지 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잘못도 있었고 솔직히 재미없는 에피소드이지만 호주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기에 나름 간략하게 적어보겠다.
일단 첫 번째 난관은 영어 점수였다. 호주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아이엘츠(IELTS) 같은 공식적인 영어 점수가 필요하다. 나는 입학이 절실했기 때문에 정말로 일하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영어 공부에만 시간을 쏟았다. 리스닝, 라이팅, 리딩, 스피킹을 당장이라도 시험 본다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내가 마치 어학원 선생님께 숙제를 내주듯 매일 라이팅 첨삭을 부탁했다. 그렇지만 나의 공부법이 잘못된 건지 노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나에게 필요한 영어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효과를 보기 마련이다.”
뒷 이야기가 더 있지만 어찌 됐든 입학 조건에 맞는 점수를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게 있다. 아무리 공부해도 시험 성적은 안 나왔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1년 후 확연히 향상된 나의 영어 실력을 보고 깨달았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효과를 보기 마련이다.
두 번째 난관은 호주 대학교에서 너무 늦게 보낸 통보였다. 나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3학년 1학기까지 마친 후 자퇴하고 호주에 왔다. 호주 대학은 입학 1년 전부터 준비했고 같은 전공으로 편입할 예정이었다. 호주 대학교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공부한 커리큘럼과 너무 비슷하기에 편입이 문제없을 거라고 하였다. 마음 놓고 영어 공부에만 매진했다. 나는 2월 말 입학 예정이었다. 그런데 2월 초 호주 대학교에서 갑작스러운 통보 메일을 보냈다. 1년 전만 해도 문제없을 거라 했는데 인제 와서 편입이 안 된다며 1학년부터 다녀야 한다고 했다.
비자 만료는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대학교를 1학년부터 다닐 등록금이 없었다. 나의 선택으로 한국에서 대학교도 자퇴하고 호주까지 왔는데 계속 일은 꼬일 대로 꼬이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나는 대학교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대학 입학만을 바라보고 1년 워킹홀리데이와 1년 어학연수를 거친 건데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처참하고 내 인생이 암흑 같았다.
호주 대학교에서는 나에게 두 가지 옵션을 주었다. 첫 번째는 디파짓(Deposit)을 수수료 없이 100% 환불해 주겠다고 하였다.(원래는 일정의 수수료를 떼고 디파짓 환불) 두 번째는 다른 과로 입학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당시 나의 상황은 복잡했다. 나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2년 반 공부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어서 자퇴했다. 작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평생 그림을 그릴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도 호주에 와서 서양화과 편입을 고집한 건 외국에서 학사를 졸업하면 어떻게든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편입하고 2년만 대학교를 다니면 외국 학사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의 이런 마인드부터가 틀려먹었었다. 학사 졸업장이 내 인생에서 뭐가 그렇게 중요하길래 당장 앞만 보고 멀리 내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걸까. 어떻게 보면 나의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고쳐주려고 세상이 마치 나에게 교훈이라도 주듯이 내 앞길을 막았던 것 같다.
이때 당시 나에게 시간은 3주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나는 단순히 학사 졸업장을 따는 것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원한 RMIT 대학교에서는 다른 과로 입학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일단 이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다. 커리큘럼을 하나하나 다 찾아보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내 미래를 상상하며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취업할 생각이 없었다. 항상 나만의 것을 창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깊었지만, 평생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나는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전시도 하고 굿즈도 만들어서 판매하고 책도 출간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작가로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혼자 해내기 위해서는 디자인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창작물이나 마케팅에 필요한 디자인은 내가 퀄리티 있게 직접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자 만료를 3주 남기고 나는 전공을 변경하였다. 1학년부터 다녀야 했지만 그래픽 디자인은 전문 학사 학위(Associate Degree)로 2년 과정이었고 학사보다 학비가 30% 정도 저렴하여 내 처지로도 해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2015년 기준)
그렇지만 여기서 또 다른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래픽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손으로 그림만 잘 그리지 컴퓨터로 디자인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며칠 전만 해도 서양화과 편입을 못 해서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는데 그래픽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고 나니 갑자기 신이 났고 괜한 자신감마저 생겼다. 왠지 모르겠지만 포트폴리오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마치 나에게 쏠리듯이 나는 말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꽤 괜찮은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여 제출하였다. 학교에서는 나의 긴박한 사정을 알고 빠르게 일 처리를 도와주었고 나는 무사히 그래픽 디자인과로 입학하였다.
다시 생각해도 그때 일은 너무 신기하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며 눈물샘이 마를 새가 없는 하루하루였는데 그래픽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고 첫 수업을 다녀와서 나는 너무나도 신이 났었다. 수업이 정말 너무 재밌었다. 학교 가는 게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일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여기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그래픽 다자인 2년 과정을 무사히 졸업하고 나름 우수한 성적을 받아 디지털 미디어과로 편입하여 1년 더 공부한 후 학사로 졸업했다. 그리하여 그래픽 디자인과 디지털 미디어 두 개의 졸업장을 거머쥐게 되었다.
굳이 타이틀을 쫓지 않아도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고 그걸 찬찬히 밟는다면 자연스레 원하는 걸 얻게 된다는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사회가 바라는 이상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해 준 그때 그 상황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태자면 나는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종로에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전시와 클래스 등 다양한 창작 시도를 하였다. 또한 아티스트 마켓에 참여하여 일러스트 굿즈를 판매하고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빈티지의 위안>과 <멜버른의 위안> 두 권의 에세이를 출간하였다.
이 글을 마무리 짓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그저 외국 대학의 학사 타이틀만 바라보고 서양화과에 무사히 편입했으면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러스트레이터 여울(Yeouul)
<빈티지의 위안>, <멜버른의 위안> 저자
Instagram: @yeouulartㅣ@yeouul_illustrator
Youtube: 여울아트(Yeouul Art)ㅣ 여울여울
Website: https://yeouul.creatorlink.net
여울 Yeouul https://brunch.co.kr/@yeouul/118
(이 글은 여울 Yeouul 작가님께서 행복한가에 기부해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 출처 : 행복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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