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글 지어주는 법
성자는 책 읽기 좋아하여
어릴 적부터 책을 읽으니
열다섯에 남화경 읽고
스무살에 대편에 이르렀네
지푸라기 배 동동 띄우고
닷 섬들이 박 둥둥 띄우니
책 마주하여 재삼 감탄하며
고개 들고 숙이는 사이 천하를 다녔어라
<중략>
백천 자를 연이어 부름에
물 흐르듯 막힘없이 쏟아내니
마치 저 침을 뿜는 사람이
구슬과 안개를 어지러이 쏟아내는 것 같고
마치 저 최고의 대장장이가
쇠를 한 용광로에서 주조하는 것과 같았도다
<후략>
成子好讀書 성자호독서
讀書自妙年 독서자묘년
十五南華經 십오남화경
二十至大篇 이십지대편
浮浮芥爲舟 부부개위주
汎汎五石瓠 범범오석호
臨書再三歎 림서재삼탄
俛仰撫八區 면앙무팔구
<중략>
連呼百千字 련호백천자
汩汩如流注 골골여류주
如彼噴唾者 여피분타자
雜下珠與霧 잡하주여무
如彼大冶者 여피대야자
金鐵一爐鑄 금철일로주
<후략>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삼연집(三淵集)』 권1 「일본으로 가는 성백규를 전송하며[送成伯圭之日本]」중에서
< 해설 >
북송(北宋) 때 문장의 대가인 구양수(歐陽脩)는 절친한 벗 윤수(尹洙)가 죽자 「윤사로묘지명(尹師魯墓誌銘)」을 지었다. 그런데 윤수의 가족과 문인들은 구양수의 묘지명이 지나치게 간략하다고 불만을 표시하며 다시 지어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에 구양수는 약간의 내용만 보충한 채 자신이 그렇게 지은 까닭을 따로 저술하여 윤수의 집안에 보냈다. 그 글이 바로 「논윤사로묘지(論尹師魯墓誌)」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보건대 한퇴지(韓退之)가 맹교(孟郊)에게 준 연구(聯句)는 맹교의 시와 흡사했고, 번종사(樊宗師)의 묘지(墓誌)를 지을 때는 번종사의 문장과 흡사했으니, 한퇴지가 그들을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윤사로의 묘지를 지을 때 의미를 특히 깊게 하고 말은 간결하게 했다. 이는 대개 윤사로의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그 의미가 심장했기 때문이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서 여타의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벗이자 묘지문의 당사자인 윤수 만을 생각하며 윤수의 문장 법식대로 글을 지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최고의 찬사이자 최고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아쉽게도 이런 뜻을 윤수의 가족들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듯하다. 윤수의 아들은 결국 당시 재상을 지낸 한기(韓琦)에게 별도로 묘표(墓表)를 청했으니 말이다.
김창흡은 “삼연이 문호를 따로 열어, 조선에 새로운 시풍이 일어났다. [三淵別門戶 左海新鼓吹]”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시단의 고루한 풍조를 쇄신한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이다. 인용한 시는 1682년(숙종8)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일본에 가는 성완(成琬, 1639~1710)에게 삼연이 지어준 것으로, 장장 100운이 넘는 대편(大篇)의 극히 일부이다. 성완은 이때 벼슬을 하지 않은 포의(布衣) 신분이었는데 오직 문장의 명성만으로 당시 문형(文衡)인 김석주(金錫胄)의 천거를 받아 일본에 가서 조선 문인의 실력을 보여줄 제술관에 선발되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성완의 묘지명에 따르면, 성완은 이미 13ㆍ4세 때에 남노성(南老星)에게 수학하여 큰 진보를 이루어 스승인 남노성조차도 가르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어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에게 『사기(史記)』와 『장자(莊子)』 등 대편거질(大篇巨帙)을 배웠고 어린 나이에 채유후(蔡裕後),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김수항(金壽恒), 남용익(南龍翼) 등 당대의 명공대가(名公大家)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만큼 명성을 드날렸다. 또 성완이 일본으로 가기 전 김수항의 별서(別墅)인 청휘각(淸暉閣)에서 포의의 신분으로 당세의 거장들 앞에서 문장을 거침없이 지어내자 모두 신의 경지라며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삼연은 아마 이 당시 청휘각에서 성완을 만나 이 시를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연이 성완에게 글을 지어준 방식이 앞서 구양수의 방식과 닮아있다. 삼연은 민첩하게 백천(百千) 구를 지어내는 성완의 솜씨에 걸맞게 그에게 주는 시 또한 대편의 방식을 취했다. 또 『사기』와 『장자』 등의 명문장을 탐독한 성완의 독서 성향에 맞게 작품 곳곳에서 『장자』의 표현법과 기상으로 시를 지어주었다.
인용한 시구에서 지푸라기 배와 닷 섬들이 박을 언급한 것은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물이 괴여 쌓인 것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한 잔의 물을 마루의 움푹 파인 곳 위에 쏟으면 지푸라기는 배가 되어서 뜰 수 있지만 거기에다 술잔을 놓으면 가라앉아서 바닥에 붙어버리니 이는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라고 한 구절과 “지금 그대에게 닷 섬들이 커다란 박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것을 큰 술통 모양으로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떠다닐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이 얕고 평평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 [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 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 無所容]”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곧 성완이 어릴 때부터 독서를 통해 점점 국량을 크게 키우면서 포부를 넓혀나간 것을 형용한 말이다.
또 고개를 들고 숙이는 사이 천하를 다녔다는 것은, 『장자』 「재유(在宥)」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며 “그 빠르기는 고개를 한 번 들었다가 숙이는 사이에 사해의 밖에까지 갔다가 올 수 있다.[其疾 俛仰之間 而再撫四海之外]”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이는 곧 성완이 독서를 통해 드넓은 기상을 길렀음을 형용한 말이다.
또 침을 뿜는 사람과 최고의 대장장이는, 『장자』 「추수(秋水)」에 “그대는 저 침을 뿜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재채기를 하여 침을 뿜으면 큰 것은 구슬 같고 작은 것은 안개 같아 어지러이 떨어지는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지금 나는 나의 타고난 천기를 움직일 뿐 어째서 그러한지는 알지 못한다. [子不見夫唾者乎 噴則大者如珠 小者如霧 雜而下者 不可勝數也 今予動吾天機 而不知其所以然]”라고 한 것과 「대종사(大宗師)」에 “지금 한결같이 천지를 큰 용광로로 삼고 조화옹을 최고의 대장장이로 삼는다면 어디에 간들 안 될 것이 있겠는가. [今一以天地爲大鑪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성완의 문장 실력을 『장자』의 표현법으로 칭송하였다.
이 무렵 삼연은 한창 한위고시(漢魏古詩)에 푹 빠져 의고악부(擬古樂府)의 습작(習作)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이때를 전후한 삼연의 시들은 『초사(楚辭)』및 악부고시(樂府古詩)의 표현법과 풍취가 물씬 묻어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배경인 『초사』나 악부시를 숙독하여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읽고 뜻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난해한 구석도 있다. 이런 시기에 삼연은 성완에게 글을 지어주면서 오로지 성완의 문장 법식에 입각하여 그의 문장 실력을 칭송하였다. 이는 성완에게 최고의 찬사이자 예우가 되거니와 또한 삼연 정도의 큰 문장 실력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당시 성완은 이 글을 받아들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자기 자신의 독서 취향과 문장 법식으로 된 글이 참으로 영예롭지 않았을까. 10여 세 아래 후배 문인의 문장 실력이 새삼 새롭게 보이지 않았을까.
글은 대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명확한 통로이다. 때문에 자기 견해과 습기(習氣)를 버리고 상대방의 면모에 입각해 상대의 법식대로 짓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글이 범람하는 때가 없다. 각종 SNS와 댓글에 우리는 일방향의 글을 쏟아붓는다. 야단(野壇)의 법석(法席)이 따로 없다. 오만하고 공격적이고 무례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말들이 칼날처럼 서로를 벤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문장으로 마음을 교유하지도 벗을 모으지도 않는다. 삼연의 글을 읽고 있자니 옛 사람의 글 지어주는 법도에 흥취가 새롭다. 내가 이런 글을 지을 수 있다면, 나에게 이런 글을 지어줄 벗이 있다면 그 아니 좋으랴.
글쓴이 : 이승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권역별거점번역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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