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고전 최고의 모험 서사, 열하일기

백광욱 2020. 6. 24. 00:01

고전 최고의 모험 서사, 열하일기

 

< 번역문 >

내가 한양을 떠난 지 여드레 만에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말 위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학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남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들어가게 되니, 만약 중국의 큰 학자를 만난다면 무엇으로 질문하여 애먹여 볼까 하였다. 마침내 예전에 들은 것 중에 지전설과 달 세계 등의 이야기를 찾아내 매일 말고삐를 잡고 안장에 앉아 졸면서 생각을 이리저리 풀어내니 거듭 쌓인 것이 수십만 마디의 말이었다. 마음속의 쓰지 못한 글자와 허공의 소리 없는 글들이 날마다 몇 권의 책이 되었다. 비록 말은 근거가 없어도 이치는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말타기에 피로가 누적되어 붓으로 옮겨 적을 겨를이 없었다. 근사한 생각은 하룻밤 자고 나면 싹 바뀌고 말았지만, 다음날 뜻밖에 기이한 봉우리를 바라보고 또 다시 배를 따라 새로운 풍경이 수시로 펼쳐지는 것을 보니 참말로 긴 여정의 좋은 벗이자 머나먼 유람의 지극한 즐거움이었다.

 

< 원문 >

余離我京八日, 至黃州. 仍於馬上自念, 學識固無, 藉手入中州者, 如逢中州大儒, 將何以扣質, 以此煩冤. 遂於舊聞中, 討出地轉月世等說, 每執轡據鞍, 和睡演繹, 累累數十萬言. 胸中不字之書, 空裏無音之文, 日可數卷. 言雖無稽, 理亦隨寓, 而鞍馬增憊, 筆硯無暇. 奇思經宿, 雖未免沙蟲猿鶴. 今日望衡分外奇峰, 又復隨帆劈疊無常, 信乎長途之良伴, 遠游之至樂.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곡정필담(鵠汀筆談)」

 

< 해설 >

1780년 5월 25일, 재야의 한 백수 선비는 마침내 간절히 바라던 북경 유람을 향해 길을 나섰다. 명목은 사행단의 총 책임자인 팔촌 형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었지만, 백수의 선비에겐 몰래 품은 간절한 꿈이 있었다. 당시 최고 강대국인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꼼꼼히 살펴 조선에 적용하여 낙후된 현실을 타개하고 도그마에 빠진 폐쇄적인 제도와 규범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조선은 기술 수준이 낮았고, 백성들은 굶주렸으며, 사상의 자유가 없었다. 유학은 종교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으며 사대부들은 도덕만을 앞세우다가 실제의 삶을 외면했다. 답답한 조선의 현실을 바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것은 저 중국의 발달한 제도와 문물을 이용해서 조선의 삶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미 사우(師友)인 홍대용, 수제자인 이덕무, 박제가 등은 북경에 다녀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중국의 문물을 자랑하고 있던 터라 더욱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두려웠다. 중국은 처음 가보는 세상이었다. 중국을 다녀온 지인들이 아무리 중국의 문물에 압도되었어도 그곳은 조선 사회가 오랑캐라 부르며 치를 떠는 곳이었다. 중국을 어떤 시선으로 보며 학자들과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니 걱정되었다. 대국의 학자들을 애먹일 수 있는 화제가 필요했다. 경학과 역사로 겨루자니 종주국의 학자들에겐 불리할 것이기에, 그는 홍대용이 들려준 지구와 달에 대한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앞시대 학자인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의 글과 홍대용의 주장을 통해 지구와 해, 달, 별들의 자전과 운행을 믿었다. 그러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지구가 둥글며 돈다는 사실을 중국 학자들이 믿어줄까? 이들을 어떻게 압도할지, 그는 말을 탄 채 피곤해 졸면서도 이리저리 생각을 굴렸다. 문자로 쓰지 못한 수십만 마디의 말이 가슴에 새겨지고 소리 없는 문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의 머리와 가슴에선 매일 여러 권의 책이 쓰였다. 중국의 학자 왕민호와 대화한 필담 기록물인 『곡정필담』을 살피면, 그는 다음과 같이 중국 학자를 설득하였다. “하늘이 창조한 물건은 모가 난 것이 없습니다. 모기의 넓적다리와 벼룩의 궁둥이, 빗방울과 눈물, 침 같은 것도 처음부터 둥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저 산과 강, 대지, 일월성신은 모두 하늘이 창조한 것이지만 아직 모난 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증명할 수 있지요.” “만약 지구를 허공 가운데에 붙박아 놓고 움직이지도 돌지도 못하게 하여 우두커니 공중에 매달아 준다면 바로 물을 썩게 만들고 흙을 죽게 해서 즉시 썩어 문드러져 흩어지는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오래도록 정지하여 머물면서 허다한 물건들을 실을 수 있으며 강물을 쏟아지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과학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참으로 인문학적인 설명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평소 겁이 많았던 한 선비는 저 노력과 마음가짐으로 북경에 도착했다. 그리곤 건륭제가 북경에서 4백여 리 떨어진 열하에서 고희잔치를 여는 바람에 조선 역사상 최초로 전혀 가본 적 없는 땅을 향한 모험을 겪게 되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너는 무리수를 감행했고, 조선에서 이단으로 보는 황교(黃敎)의 최고 지도자 판첸라마를 만나는 우여곡절을 체험했다. 중국의 대학자들과 만나서는 조금도 기죽지 않은 채, 졸음을 참아가며 준비했던 지구와 별, 우주에 대한 견해를 한껏 쏟아냈다. 장장 5개월에 걸친 열하 여정은 10월 27일 한양 도착과 함께 무사히 끝났다.

 

그는 자신이 은거하던 연암협으로 들어가 열하 여정에서 보고 들은 중국의 사람들과 건물, 제도와 문화를 자신의 여행기에 하나하나 담아냈다. 사소한 제도와 건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모두 기록했다. 여정 중에 겪은 소소한 사연과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조선의 삶과 현실을 병치시키며, 조선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꼬집었다. 때로는 은밀한 우언으로, 때로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때로는 중국인의 입에 기대어,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사인 듯이 자신의 속생각을 내보였다. 우리 고전 최고의 모험 서사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열하일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배우려는 한 지식인의 탐구심과 호기심이 가득하다.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한 인간의 열망과 탄식, 진심과 고민이 뜨겁게 타오른다. 일상의 풍물부터 천하대세의 전망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풍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세계사의 전망을 모색한 혜안이 빛난다. 갇힌 일상과 규범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은가? 소소한 교양 지식을 뛰어넘어 지성과 비판 정신에 대해 알고 싶은가? 인간과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고 문명과 인간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친 복합장르서, 『열하일기』가 있다.

 

글쓴이 : 박수밀(朴壽密)
고전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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