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영원히 기억하는 방법
< 번역문 >
정묘년(1747, 영조23) 5월 선생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였다. 10년 동안 궁벽한 시골에 있으면서 끝내 하늘의 해를 다시 보지 못하고 하늘 끝 변방의 객관에서 돌아가셨다. 하늘이 큰 현인을 내고도 시운(時運)을 함께 주지 않았고, 소인들의 중상모략에 시달려 성상을 끝까지 섬기지 못하였으니 백성들이며 후학들의 불행이다. 더군다나 나 같은 사람은 가르침을 채 다 받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선생을 잃은 아픔을 차마 형언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영구가 물길을 통하여 정진(鼎津)을 거쳤으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여 맞이해 곡할 수 없었기에 한없이 통탄스러웠다. 이해 겨울에 안경직(安慶稷)과 함께 가서 곡하며 술잔을 올리고 또 묘 아래에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그만이니 이 생 어느 곳에서 그분께 우러러 절할 수 있을까.
< 원문 >
丁卯仲夏。聞先生訃痛哭。十載荒陲。終未復見天日。易簀於天涯旅舘。旣生大賢。不並畀時。厄於狺狺。遭際莫終。蒼生無祿。後學不幸。况如小子。未畢餘誨。遽失依歸。樑摧之痛。尙忍言哉。先生靈柩由水路過鼎津。而漠然無聞。末由迎哭。痛歎無窮。以是年季冬。同安慶稷奔哭奠酹。又拜墓下而歸。今其已矣。此生何處。瞻拜儀形哉
* 畀 : 원문에는 ‘卑’로 되어 있는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 『밀암집(密菴集)』 권15 「祭文(金聖鐸)」을 참고하여 ‘畀’로 수정하였음.
-황후간(黃後榦, 1700~1773), 『이봉집(夷峯集)』권5, 「천상종사록(川上從師錄)」
< 해설 >
위는 황후간이 스승인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을 추념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저자는 이에 앞서서도 이재(李栽, 1657~1730)를 스승으로 모시며 「금양종사록(錦陽從師錄)」을 썼다. 금양은 이재가 살았던 안동(安東) 금수(錦水), 천상은 김성탁이 살았던 안동 천전(川前)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 종사록에는 스승으로 모시게 된 계기, 수학하면서 보고 들은 스승의 언행, 스승과의 일화, 스승을 추모하는 저자의 감회 등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금양종사록」은 강학 내용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비교적 자세하고, 「천상종사록」은 보다 중요한 일 위주로 기록되어 앞 사건과 뒤 사건의 시점의 차이가 비교적 크다는 점이 다르다. 이는 두 스승을 모신 물리적 시간의 차이 때문이라고도, 「금양종사록」을 썼던 경험이 「천상종사록」에도 이어져 서술 방식에 영향을 미친 이유라고도 볼 수 있겠다.
'군사부일체'라는 말로 알 수 있듯 옛적 스승의 존재는 현재 스승의 위상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충효(忠孝)가 강조되었던 유가적 전통세계에서 군부(君父)와 동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현재와 달리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방법 외에 배움에 효과적인 다른 수단은 있지 않았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만 자신이 추구하는 지적 세계를 넘어다볼 수 있었으니, 그 존재는 학문을 통해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지적 절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학문에 남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뛰어난 학자로 이름난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아들 이재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저자의 술회에 따르면, 저자는 시골에서 생장하여 배움의 기회가 적었기에 바른 연원이라고 생각하였던 이재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토록 원하던 노스승 아래에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시운이 따로 있는 것일까. 사제의 연을 맺은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저자는 이재를 여의게 된다. 존신(尊信)하던 스승을 잃은 슬픔은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다 그러다가, 슬픔을 조금 외면할 수 있을 때쯤 당면한 의지할 곳을 잃은 막연한 심정에 저자는 새로운 스승을 찾게 된다. 선사(先師)가 ‘사람이 옥 같고 학식이 넉넉하다'고 일컬었던 김성탁이 바로 그였다.
김성탁은 이현일의 제자로, 「천상종사록」에 따르면 이재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고 한다. 같은 스승을 모신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문에 대한 저자의 의지가 그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때론 편지를 주고받기도, 때론 직접 찾아가기도 하면서 저자는 다시 학문에 안정적으로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승이 조정에 중용되어 부수찬에까지 오르게 되자, 저자는 이 일에 대한 우려의 심정을 짤막하게 남겼다.
첫 번째 스승을 잃었던 아픈 기억 때문에 화를 감지하는 어떤 예민한 눈이 생긴 것일까. 이 우려는 현실이 된다. 김성탁이 이현일을 신원하는 소장을 올렸다가 심한 국문을 당하고 저 머나먼 제주(濟州) 정의(㫌義)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곧 광양(光陽) 섬진(蟾津)으로 이배되어 절도(絶島)를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광양도 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궁벽한 곳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천상종사록」의 후반부 기록은 섬진의 배소를 오가며 수학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한 사람의 언행을 영원히 남길 수단이 글뿐이었던 당시 저자에게 종사록의 작성은 단순한 기억의 기록 차원을 넘어섰을 것이다. 학문에 대한 의지가 컸던 만큼 스승을 존신하는 마음이 컸을 테고 스승을 존신한 마음이 컸던 만큼 스승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컸을 것이며 스승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컸던 만큼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것이다.
스승의 존재감이 저자 자신에게 컸었기에 단순히 외모와 육성만을 홀로 기억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은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을 터이다. 또한 그분의 언행이 내 기억에는 생생히 살아있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유할 길이 없을뿐더러, 또한 나의 생이 다하면 그 기억도 영원히 소멸되기에, 종사록의 작성은 세상이 스승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옛적 스승의 품격을 가진 분이 필자에게도 계셨다. 바로 고전번역과 후학양성에 평생을 바치신 소계(小溪) 임정기(任正基, 1948~2019) 선생이다. 몇 해 전에 신입사원으로서 선생님의 방에 배치된 일은 진정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어느 누구의 어떤 물음에도 자상하게 대해주셨다. 그 자애로움은 천성인 듯싶었다. 봄에는 어미와 떨어진 냇가의 새끼오리가 행여 무슨 해라도 당할까 걱정하셨다. 또한 북한산에 봄꽃이 한창 만발하던 때에는 후배들과 시를 읽고 막걸리를 마시며, 나이를 잊고 흥겹게 어울리곤 하셨다. 그 꽃이 지고 신록의 빛이 깊어지던 어느 해 여름에는 당신의 평생 소원이라고 하시던 홍도와 흑산도를 두루 유람하였다. 파도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던 그날 그밤 남도에서의 싱그러운 그 미소를 나는 기억한다. 만산이 홍엽이던 어느 가을 날 그분의 코트깃 사이에서 쓸쓸히 피어난 담배 연기에 담긴 상념은 무슨 의미였을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며 출근길에 옷깃을 떨치시곤 잔뜩 하얀 추운 창을 응시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신은 요 몇 년 사이에, 이 광명한 세상을 저버리는 일이 두렵다고 하셨다. 아무런 지병도 없던 분이 하필 한 해 중에서도 가장 햇살 좋은 이 계절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버리셨다. 사정이 있어 잠시 시 강독 모임을 떠나 있었으나 언제고 다시 글을 배우고자 했던 필자에게 선생님의 소식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올해 4월 어느 날 선생님 기일을 즈음하여 함께 시를 배운 분들과 그분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티 없이 맑은 하늘에 햇볕이 유난히 따가운 날이었다. 당신이 좋아하시던 막걸리를 올리고 또 묘 아래에서 절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그 곁에서 선생님을 추념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유난히 따가운 햇볕을 피해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람이 세찬 덕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선생님이 우리와 함께 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 옛날 송나라의 주광정(朱光庭)이 정호(程顥)를 여남(汝南)에서 뵙고 돌아와, 봄바람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고 말했던 일이 있다. 필자가 선생님을 모시며 배운 시간 동안은, 선생님의 묘소를 참배한 그날처럼 꼭 알맞은 봄바람 속에 있어 따뜻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고전산책을 좋아하는 분들께 필자의 사적인 사연을 소개하는 일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지만, 선생님을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뵐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스승의 모습을 글로 남겼던 옛 분의 사연을 빌어 독자분들의 해량을 청한다.
글쓴이 : 강만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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