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만나지 못한 친구

백광욱 2020. 6. 16. 00:01

만나지 못한 친구

 

한 번 웃으며 만나는 데 뭔 인연이 필요하단 말인고
쓸쓸한 마을 기나긴 밤에 홀로 잠 못 이루고 있네
오늘 아침에 도리어 쌍성(雙城) 향해 떠났다 하니
하늘 끝자락의 구름과 나무는 더욱 아득하여라

 

一笑相逢豈有緣일소상봉기유연
孤村永夜不成眠고촌영야불성면
今朝却向雙城去금조각향쌍성거
雲樹天涯倍渺然운수천애배묘연

 

- 이춘영(李春英, 1563~1606), 『체소집(體素集)』 상권 「미곶(彌串)으로 신경숙(申敬叔 신흠(申欽))을 찾아갔더니 경숙이 이미 떠났다기에 홀로 자다가 감회가 들다. [彌串訪申敬叔, 敬叔已去, 獨宿有感.]」

 

< 해설 >

‘만남’을 뜻하는 한자는 제법 많다. 우(遇), 봉(逢), 조(遭), 해(邂), 후(逅) 등등 소위 ‘책받침(辶)’이라는 부수가 들어가는 이런저런 글자들이다. 그런데 이 글자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모두 ‘우연히 만나다’라는 뜻이다. 요즘에는 누군가를 만나려면 으레 미리 전화해서 약속을 잡거나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 이런 세상에 길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드문가. 하지만 통신 수단이 별로 없던 옛날에는 누군가와 실시간으로 약속을 잡아 만난다는 건 불가능했으며, 혹여 사는 곳을 찾아가더라도 운이 없으면 만나지 못하는 일이 십상이었다. 그래서 유비(劉備)도 세 번이나 제갈량(諸葛亮)을 찾아가면서 역사를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만남’이란 대부분 필연이 아닌 우연이었을 것이다. ‘만날 우(遇)’ 자가 드물게 ‘우연할 우(偶)’자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이 시의 저자인 이춘영(李春英)도 과거에 으레 그랬듯 우연히 친구를 만나러 찾아갔다. 마침 평안도를 유람 중이던 저자는 친구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공무 때문에 평안도의 미곶(彌串)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나 보다. 거듭된 전란으로 혼란스럽던 때에(당시는 한창 정유재란(丁酉再亂) 중이었다.) 공무로 바쁜 친구를 우연히 라도 만나는 건 자주 찾아오지 않는 기회였으리라. 하지만 저자는 단 하루 차이로 끝내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만다. 미곶에 도착했더니 친구는 그날 아침에 벌써 저 멀리 함경도의 쌍성(雙城) 쪽으로 떠난 것이다.

 

그날 홀로 묵으며 쓸쓸함을 이기지 못한 저자는 그 심정을 시로 읊어냈다. 도대체 친구끼리 한 번 웃으며 만나는 데 대체 꼭 무슨 거창한 인연(因緣)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마지막 구에서 저자는 서로 길이 엇갈려버린 둘의 신세를 아득히 떨어져 있는 구름과 나무로 표현하고 있는데, 구름과 나무는 친구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는 두보(杜甫)가 벗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지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이란 시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위수(渭水) 북쪽에 머물던 두보는 장강(長江) 동쪽에 있던 이백을 그리워하며, “위수 북쪽 봄날에 나무 한 그루요, 장강 동쪽 저물녘 한 점 구름이라. [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라고 멀리 떨어져 있는 둘의 신세를 읊은 바 있다.

 

옛날에는 이처럼 가까운 친구끼리의 만남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만큼 한 번 만남이 소중했고 한 번 이별이 애틋했으리라. 괜히 옛날 문인들이 누구를 만나면 반갑다고 시 한 수 지어주고, 이별하면 또 아쉽다고 전별시 지어줬던 게 아닐 것이다. 지금은 서로 만나고 있지만 언제 다시 기별이 닿을지,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지 쉽게 기약할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너무나도 많다. 육성으로 통화 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가볍게 문자라도 한 통 보내면 그만이다. 어느새 친구와의 만남에 ‘우연’이 쏙 빠지다 보니 만남의 무게도 그만큼 가벼워진 느낌이다.

 

언젠가부터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너와 밥을 언제 먹을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변질되고 만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다음번 만남’이라는 것이 그리 소중하지 않은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또 가뜩이나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하다 보니, 안 그래도 나무와 구름처럼 멀어진 친구 사이가 하늘 끝자락으로 한 발짝 더 멀어진듯한 기분이다.

 

얼마 전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필자의 친구에게서 오래간만에 전화 한 통이 왔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고 나서 요즘 시국에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밥 한 번 먹자는 이 친구를 언제 만나지? 하며 애써 걱정하는 나 자신을 괜시리 돌아보게 되었다. 그 옛날 누군가는 친구를 애써 만나지 못한 외로움에 그토록 사무쳤는데, 지금 사람들은 어째서 친구를 애써 만나지 않는 외로움을 이토록 즐기는 것일까. 과거에는 ‘만나지 못한’ 친구가 많았다면,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가 참 많은 시절이다.

 

글쓴이 : 허윤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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