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아닌 네 벗
차라리 비류(非類)와 벗할지언정 비덕(非德)과는 벗할 수 없다.
寧以匪類友 不可以匪德友
녕이비류우 불가이비덕우
- 이현석(李玄錫, 1647~1703), 『유재선생집(游齋先生集)』15권 「사우계서(四友稧序)」
위 글의 작자인 유재(游齋) 이현석은 경신·기사·갑술환국 등 당쟁이 격심했던 숙종조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붕당의 폐습을 경계하며 당쟁을 없애야 한다고 수차례 역설하였는데, 숙종은 그를 두고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며, 오광운(吳光運)은 『유재집』 서문에서 “당의(黨議)에 물들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다.
기사환국이 있었던 1689년, 남인 계열이었던 그는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로 삼고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키는 것에 동조하였던 남인 무리들과 뜻을 달리한 까닭에, 배척을 받아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헌이 되어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혁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논계를 받아 삭탈관작 되기도 하였다. 그는 수차례 파직되고 좌천되었으며 내직과 외직을 드나들었다.
그의 성정과 내력을 살펴보건대 당쟁에 지치고 인간에 환멸을 느꼈을 법도 하다. 어릴 적부터 독서광이었던 그에게 한줄기 위안을 주는 벗은 문방사우(文房四友) 뿐이었을 것이다. 창가의 책상에는 늘 그들이 있었다. 무한한 즐거움을 주었던 것은 물론이오, 뜻이 맞는 벗이었다.
“같은 부류끼리 모이고 덕으로써 의기투합하는 것은, 벗의 도가 그러하다.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부류에 속한다. 그 중에는 손해되는 벗도 있기 마련인데 군자는 유익한 자하고만 벗하니, 그렇다면 군자가 중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덕에 있다. 따라서 사람은 차라리 인간이 아닌 것[非類]과 벗할지언정 덕이 아닌 것[非德]과는 벗할 수 없는 것이다.……벗하기 위해서는 덕으로 합해야 하고, 덕이 합하려면 오래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침에는 폐와 간도 내어 줄 것처럼 하던 자가 저녁에는 창을 들이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도리어 사람과 사물이 서로간의 차이를 잊고 시기하지 않으며 함께 무리지어 오래도록 지내는 것만 못하다.[類以聚德以合, 友道然矣. 人盡類也, 損亦友爾, 而君子獨友益, 卽其重, 專乎德耳. 是以人寧以匪類友, 不可以匪德友……夫友要合德, 德合要久, 而朝而出肺肝者, 暮或相戈矛, 反不如人與物之相忘而勿猜, 共群而久處.]”
사우(四友)의 덕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잘못을 질책하지도 공을 내세우지도 않으며, 화를 내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털이 뽑히고 머리가 갈리고 몸이 더러워지는 와중에도 묵묵히 본분을 다하여 문필(文筆)의 업을 이루어낸다. 작자를 포함하여 그들 다섯 중에 하나만 없어도 공을 이룰 수 없다. 기쁨과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서로를 성장시킨다. 계를 맺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비류(非類)와 벗한 사람들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매·죽·송·국(梅竹松菊)을 기르며 절우사(節友社)라 이름한 퇴계(退溪) 선생도 있고, 수·석·송·죽(水石松竹)과 동산(東山)의 달을 노래한 오우가(五友歌)의 주인 고산(孤山) 선생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우리의 주위에는 늘 조용히 도움을 주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다.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심신이 지치고 괴로울 때 빛을 내는 것들…….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는 중에 무심코 본 창밖의 달일 수도 있고 집에 돌아오는 길목에 핀 목련일 수도 있다. 땀 흘린 뒤 마시는 시원한 맥주이거나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이거나 어린 아이의 해맑은 미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소리 없는 벗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자기를 알아봐주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사우와의 우정 덕분이었을까. 이현석은 800여 수의 아름다운 한시가 담긴 『유재집』을 저술하였고, 방대한 역사서로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명사강목(明史綱目)』을 남겼다.
글쓴이이제유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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