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창을 삼은 서재
< 번역문 >
나라가 빗장을 잠그고 지낼 때엔 바다를 벽으로 삼았거니와 나라가 문을 열고서는 바다를 창으로 삼는다. 바다를 벽으로 삼았을 땐 독서 선비들이 조선 유학만을 숭상하고 조선 유학에만 익숙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견식 외에는 달리 견주어볼 만한 사유가 없어 오히려 다른 학설이 침입할까 두려워하며 배척하는 것을 대의(大義)로 알았다. 그러다가 바다를 창으로 삼자 독서 선비들이 고금古今의 역사를 헤아려보고 동서양의 사유를 종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타인의 견해를 존중하여 기꺼이 장점을 받아들여 오히려 조선 유학이 편협해질까 걱정하며 겸허히 수용하는 것을 주된 의리로 삼고 있다.
전인(前人)이 편협하고 후인(後人)이 활달하다는 뜻이 아니며, 전인이 어리석고 후인이 지혜롭다는 말도 아니다. 이는 진화의 계단이며 역사의 흐름이다. 가령 전인과 후인의 처지가 바뀌더라도 모두 그럴 것이다. 대세의 운동에 그 궤도를 따를 이 누구인가. 또한 천하의 이치가 어찌 한 나라 한 개인의 사유물이겠는가?
내가 젊은 시절 성현의 책과 영웅들의 사적(史籍)을 읽을 때 번번이 시정(時政)의 불합리와 인문의 미비함을 안타까워했다. 뒤에 바다밖에서 공화주의의 설이 들어왔을 때엔 공자의 대동설(大同說)과 부합하는 것에 기뻤고, 또 민주주주의 설이 들어왔을 때엔 맹자의 민귀설(民貴說)과 부합하는 것에 기뻤으며, 국제연맹의 소식이 날로 전해올 때엔 춘추회맹(春秋會盟) 의리와 같다는 것에 기뻤다. 이용후생(利用厚生)과 부합되는 이 여러 설들로 말하면 어찌 타자에게 비추어보아 우리 유가의 사상을 다시 밝힌 것이 아니겠는가? 창은 빛을 받는 곳이다. 이 때문에 내 서재에 ‘해창’이라 이름을 붙인다.
원문 |
國之鎖居也, 以海爲墻, 國之開放也, 以海爲窓, 其爲墻也, 讀書之士, 尊吾所見, 習吾所聞, 故已見之外, 無他可照, 猶恐他說之侵入以排外爲大義. 其爲窓也, 讀書之士, 斟酌古今, 綜合東西, 故舍已從人, 樂取爲善, 猶恐吾說之偏着, 以虛受爲主義. 非曰前人窄後人闊, 非曰前人愚後人智, 是乃進化之階段也, 歷史之步趨也. 若使前人後人昜地而皆然也. 大勢之轉運, 孰能順其軌道也, 且天下之理, 豈一國一人之私哉. 余少也, 讀聖賢書英雄史, 每嘆時政之不合, 人文之未備, 及其海外有共和之說舶來, 然後喜與孔子大同之說合, 又民主之說舶來, 然後喜與孟子民貴之說合, 有聯盟之會日報, 然後喜與春秋會盟之義同. 種種諸說, 合於利用厚生者, 豈非照乎外而明于內者耶. 窓, 受明之所也, 故名吾讀書之室曰海窓.
- 송기식(宋基植, 1878~1949), 『해창문집(海窓文集)』권5, 「해창설(海窓說)」
< 해설 >
어리석고 야무지지 못한 사람을 흔히 꺼벙이라고 낮잡아 부른다. 꿩병아리를 이르는 꺼병이에서 온 말이라고 하다. 꺼병이는 다급한 상황을 만나면 나뭇잎을 움키거나 숲덤불 속에 머리를 숨기고 발랑 눕는다. 딴에는 제 몸을 꽁꽁 숨긴다고 하는 특단의 계책이다. 작은 눈을 가릴 뿐 그런다고 다급한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제 눈에만 보이지 않으면 다급한 상황이 사라졌다고 여기는 그 좁은 소견을 순진하다고 해야할까 어리석다고 해야할까.
서세의 격랑이 사나운 기세로 동아시아를 덮치던 19세기 후반, 우리는 예기치 못하고 맞닥뜨린 위기의 상황에서 허둥지둥 나라의 빗장을 걸어잠궜다. 이념화된 학문은 한층 경색되었다. 이른바 쇄국이다. 양이(洋夷)를 공척하자는 배타적 논리의 이면에 자리한 두려움을 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눈을 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단선적인 대처로 말하면 저 꺼병이와 다름없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고 서세의 거친 너울이 제 스스로 잦아들 리 없다. 맹목은 합리적인 판단과 대처를 방해할 뿐 끝내 더한 위험을 초래한다. 국권강탈은 그 참혹한 결말이다.
쇄국의 결단을 무조건 매도하기는 어렵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19세기 초까지 외교와 국방에서 청나라의 통제에서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던 터라 나라밖 사정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문순득 표류사건이나 루손인 표류사건에서 보듯 류큐, 필리킨, 마카오, 상해, 일본 사이에 활발한 해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도 조선은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고, 1816년과 32년에 영국 상선이 조선 바다로 들어왔을 때 보인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아도 바다 밖 사정에 대개 무지한 형편이었다. 그때까지 조선은 바다를 벽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유학만을 최고로 아는 편협함이 지선(至善)으로 오인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다를 벽으로 여기는 사유는 지금도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반도에 대해 삼면이 바다로 열려있다고 여기기보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해양으로의 진출보다 육로를 통한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연결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인다. 한반도를 호랑이로 형상화한 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륙을 발판으로 해양을 향해 내닫으려는 호랑이보다 만주와 연해주 대륙을 할퀴려는 호랑이 지도를 선호한다. 우리 민족사를 극동의 조그만 땅으로 내몰린 역사로 인식하는 퇴행적 사관의 굴절된 반영이다. 역시 바다를 벽으로 인식하는 사유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대한제국 말엽의 지식인으로서 국권의 폭력적 침탈을 목도한 송기식은 우리 의식과 학문풍토의 편협성에 대해 통탄하며 자신의 서재를 해창(海窓)이라 이름하였다. 바다를 창으로 삼은 서재. 바다를 막힌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이어주는 열린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유의 대전환이다.
바다를 열기 전 많은 지식인들은 바다 밖 학문과 사상이 밀물처럼 들어온다면 조선은 침몰하고 말 것이라 두려워했다. 하지만 바다를 열자 그 창으로 들어온 것은 빛이었다. 그 빛은 오히려 어둠에 가려져 있던 조선 학술의 진면목을 되비추어주었다. 서구에서 말하는 공화(共和)나 민주(民主)가 전혀 새로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예전부터 있던 것임을 새삼 밝혀주었던 것이다. 바다의 창을 활짝 열어 폐쇄적이고 편협한 우리 지성계의 고질을 혁파하고 싶었던 해창 송기식. 서구 학문이라는 타자의 눈을 통해 도리어 우리 내면의 진가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조선 학술의 체질을 일신하려 했던 그의 당찬 포부가 짧은 글에 선연하다.
글쓴이이규필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