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아버지의 마음

백광욱 2020. 3. 18. 05:48




아버지의 마음


< 번역문 >

    한 번 배부르면 살진 듯 움직이고, 한 번 굶으면 마른 듯 움직이는 것을 천한 짐승이라고 한다. 시야가 좁은 사람은 오늘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기면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다음날 뜻에 맞는 일이 생기면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져, 걱정하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감동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체의 감정이 모두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달관한 자가 이를 본다면 우습지 않겠느냐? 그렇긴 하나 소동파가 세속의 안목은 너무 낮고, 하늘의 안목은 너무 높다고 말했으니, 만약 오래 살든 일찍 죽든 마찬가지며 삶과 죽음이 한가지라고 여긴다면 지나치게 높이 생각하는 병이라 할 것이다. 아침에 햇볕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에 그늘도 먼저 들며, 일찍 핀 꽃은 시드는 것도 빠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운명의 수레는 돌고 돌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뜻을 품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잠시 재난을 당했다고 해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남아의 가슴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을 솟아오르는 기상이 있어서, 눈으로는 천지를 좁게 보고 손으로는 우주를 가볍게 여겨야 옳은 것이다.

원문

一飽而肥, 一餒而瘠, 謂之賤畜. 短視者, 今日有不如意事, 便潛然洒涕, 明日有合意事, 又孩然解顏, 一切憂愉悲歡感怒愛憎之情, 皆朝夕變遷. 自達者觀之, 不可哂乎? 雖然東坡云, 俗眼太卑, 天眼太高, 若齊彭殤一死生, 其病又過高. 要知朝而受暾者, 夕陰先至, 早榮之華, 其隕亦疾. 風輪激轉, 無一刻停息. 有志斯世者, 不宜以一時菑害, 遂沮靑雲之志. 男子漢胸中, 常有一副秋隼騰霄之氣, 眼小乾坤, 掌輕宇宙, 斯可已也.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18권, 「신학유가계(贐學游家誡)」


< 해설 >

   아버지라는 이름에는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짐이 있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다산(茶山)도 마찬가지였다.

 

   다산 정약용은 젊은 시절부터 ‘우주 안의 일들을 모두 해결하고 정리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나갔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정조를 가까이서 도우며 각종 경세(經世) 정책을 실천해나갔다. 수원 화성을 설계하였으며 거중기(擧重機)와 유형거(游衡車)를 발명했다. 그러나 단단한 버팀목이었던 정조가 돌연 세상을 떠나면서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 전국의 천주교 신자와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다산이 20대 시절에 심취했던 천주교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다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셋째 형인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했고, 둘째 형인 정약전과 다산은 유배형에 처했다. 1801년 2월 27일, 다산은 18년에 걸친 유배길에 올랐다. 한 개인에겐 기나긴 고통이겠으나 문학사에는 축복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산은 15살에 풍산 홍씨와 결혼했다. 6남 3녀를 낳았으나 대부분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잃고 2남 1녀만 남았다. 다산이 귀양 갈 때 큰아들 학연은 19살이었고 작은 아들인 학유는 16살이었다. 다산은 한창 배움에 힘써야 할 자식들과 아내를 남겨둔 채 망망한 귀양길을 떠났다. 귀양지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자식이 좌절해서 엇나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일러주는 일밖엔 없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폐족(廢族)임을 반복해서 상기시켰다. “이제 너희는 폐족이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뿐이다.” 폐족(廢族)은 망한 가문이란 뜻이다. 망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막중한 임무가 두 아들에게 있음을, 그 길은 오직 공부하는 길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곤 틈마다 깨알 잔소리를 이어갔다. “너희 형제들, 제발 네 어머니한테 잘하라.”라고 하며 효심을 당부하고, “어찌 글공부는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훨씬 아비를 넘은 것이냐?”라며 술버릇을 다그쳤다.

 

   대부분 잔소리는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배운 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정말 한심하다며 탄식하는가 하면, 어린 시절에 공부를 게을리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며 꾸짖었다. 공부를 자극하기 위해 두 형제를 비교하기까지 했다. 자식이 혹여 빗나갈까 봐 다그치고, 자식이 게으름 피울까 봐 단속하고, 친인척에게 나쁜 소리 듣지 않도록 엄하게 경계했다. 살가운 말보다는 자극하고 혼을 냈다. 다산 역시 한 아버지로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 아버지는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약했다.

 

   1808년 둘째 아들인 학유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뵈러 왔다. 청소년기에 마흔 살의 아버지를 떠나보냈다가 이제 23살이 된 아들이 어엿한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다산은 감격스러우면서도 미안했을 것이다. 큰 재앙 속에서도 잘 성장해 주어 뿌듯했고 자식에게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다. 이때의 소감을 다산은 “눈언저리는 내 아들 같기도 하나 수염은 딴 사람 같구나. 집 편지를 지니고 왔으나 오히려 확실히 믿기질 않는다.”라고 감회에 젖었다. 이후 학유는 2년 동안 아버지 곁에서 배우면서 아버지의 저술 작업을 도왔다. 시나브로 2년이 훌쩍 지나 학유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산은 돌아가는 자식에게 마땅히 챙겨 줄 것이 없었다. 귀양살이도 어언 10여 년,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하고 자식들은 계속 폐족이라는 멸시를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고난에 처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윗글은 다산이 학유가 떠날 때 여비 삼아 준 가르침이다.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시들 듯이 사람도 너무 빨리 성취하면 금세 허물어지기 쉽다. 그러니 큰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은 당장 고난이 있다고 해서 금세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멀리 내다보고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남아는 모름지기 하늘을 나는 매와 같이 장쾌한 기상을 품고 살아야 한다. 안목을 키우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면 태산 같던 상황도 작아 보이고, 큰 산과 같던 문젯거리가 한갓 동산을 넘는 일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격려였다. 다산은 자식에게 현실의 고난 앞에서 기죽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꿈을 키우며 살 것을 당부했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앞날을 기대하면서 청운의 뜻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높은 기상과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품고 살아갈 것을 기대했다. 그러면 언젠가는 불행의 수레바퀴는 다시 바뀌어 반드시 청운의 꿈을 펼칠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그것은 다산 자신이 이십 대 시절에 온 우주를 품으며 살고자 했던 포부를, 자식에게 다시 전해주는 가르침이었다. 그리하여 정학유는 훗날 저 유명한 「농가월령가」를 저술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이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던 다재다능한 인문학자 다산, 그 우뚝한 산도 자식 앞에서는 삐치고 야단치고 잔소리하고 다그치다가 미안해하고 속상해하고 격려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의 엄한 목소리는 자식에겐 때로는 야박하고 때로는 서운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잔소리는 오직 자식의 앞날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느 아버지인들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을까? 살갑고 따뜻하지 못했기에 그 속마음은 더욱 못내 미안하고 애틋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 또한 그러하셨을 것이다.


글쓴이박수밀(朴壽密)
고전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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