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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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초나라의 장신(莊辛)은 양왕(襄王)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나라로 가버렸다. 훗날 그 지적이 옳았음을 깨달은 양왕이 장신을 불러 대책을 묻자, 그의 답변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가 듣건대 세상 사람들이 “토끼를 발견하고 사냥개를 돌아보아도 아직 늦지 않았으며,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쳐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들 합니다.(臣聞鄙語曰, “見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을 어리석게만 생각하던 나는 이 구절 앞에서 일순 당황하였다. 당시 널리 쓰던 한글 옥편을 찾아보니 ‘망양보뢰’의 뜻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와 같다고 하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국어사전의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전국책』에서 유래한 이 말의 의미를 완전히 거꾸로 읽은 것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양을 잃은 뒤에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이것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이다. 실제로 ‘망양보뢰’의 예전 용례들도 모두 이런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일부러 이 말을 써 보았더니, 그는 분명히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계책을 칭찬하였다. 전국시대 사람들의 슬기가 현재 중국인들에게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숱한 역사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지 않았던 이유를 알 듯하였다. 그리고 옛날부터 세상에 떠돌던 이러한 말과 지혜를 전해주는 『전국책』을 고전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21세기에 또 다시 부상하는 중국의 힘도 어쩌면 이렇게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미래를 준비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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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는 중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기존의 질서나 원칙은 무의미해졌고, 이 와중에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강조한 법가(法家)의 주장이 득세하였다. 과거의 선례 이야기를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아냥 거리로 삼았던 한비(韓非)의 논리가 진시황(秦始皇)의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긴 호흡으로 과거의 잘못조차 되새기는 ‘망양보뢰’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았다. 진나라의 업적과 과오를 조정(調整)하여 수백 년 지속될 왕업(王業)을 구축한 한대에도 이 말은 계속 반추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망양보뢰’의 실천이 한 왕조를 존속시켰음은 물론 유구한 중국의 역사를 만든 토양일 수도 있다.
이른바 ‘근대’는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았고, 오늘의 우리는 그 이전 시기의 기억과 경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줄곧 ‘이기적 존재’로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 좋은 예이다. 지금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이하였다고 소리치는 경우도 이러한 잘못을 범하기 쉽다. 이들에게는 현재의 체제만이 유일한 문명이고, 미래를 예측하기만 할 뿐 과거를 되돌아볼 겨를이 없다. 소를 잃어버리면 곧 외양간을 고치는 일은 안중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하여 차분히 헤아려 볼 과거의 사실은 없는가? 비록 새로운 세계가 다가온다 해도 그 중심에는 오래 전부터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설령 「심우도(尋牛圖)」의 주인공처럼 소를 찾아 떠나지는 않더라도, 일단 외양간부터 고칠 일이다. 소가 중요하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던 작년이었다. 누군가 실수나 잘못을 하였고, 어디에선가 과실과 착오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잊고도 싶지만, 우리들이 이 안에서 숨 쉬는 한 그럴 수는 없다. 새해 벽두부터 즐겁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기왕에 소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손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지혜를 간직하고 있었고, 우리들은 이를 전해주는 고전을 읽으며 살아 왔다. 이를 통해 역사는 이어지고, 그 중심에는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어리석다고 비웃지 않을 것이다.
(추기) 작년에 완간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에서는 ‘망양보뢰’의 뜻을 제대로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의 희망을 확인한다.
글쓴이 / 하원수 *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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