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상과 명리와 점복에 대한 논변[相命卜論]
이승배(李升培)
나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여러 점술가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고금의 경험이 많을 터이니, 나와 같은 관상과 명운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는 것인가?"
관상가가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귀인(貴人)은 복서골(伏犀骨)이 천정(天頂)까지 뻗치고, 이마가 넓으며 귀가 희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그대는 안색은 깨끗하고 눈빛은 맑으니, 상법(相法)으로 볼 때 욕심이 적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마에 세로 주름이 있고, 왼쪽 눈썹에 흉터가 있으니, 귀하게 될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명리가가 말하였다. “저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로 그 사람의 귀천(貴賤)과 길흉(吉凶)을 추산하여 검증하는데, 백 번에 한 번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미두수(紫微斗數)로 보면 귀인(貴人)은 명궁(命宮)에 천곡(天哭)이 있고, 관궁(官宮)에 자미(紫微)가 있으며, 사주[四星]로 보면 삼기귀인(三奇貴人)에다가 관성(官星)이 바릅니다. 지금 그대는 불(火)이 많은데 나무(木)가 빼어나며 삼기귀인은 순서가 어지럽고 사주는 치우쳤으니, 재능이 많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나, 명법(命法)으로는 귀하게 될 수 없습니다.”
복서가가 말하였다. “관(官)과 인[文]이 상생하고, 체(軆)가 용신인 효[用爻]를 극하며, 역록(驛祿, 祿馬)이 방(榜)을 비추는 점은 반드시 귀하게 될 길한 점괘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복덕(福德)이 세상에 있고, 용성(龍星)을 끼고 있습니다. 대개 복록이 두터운 국면이기는 하나, 반드시 과거에 합격할지는 제가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우쭐대다가 그만 실소하며 말하였다. “진실로 그대들의 말과 같다면, 세 측면 중 합격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30년간 부지런히 책을 읽고 과거 시험에 힘쓴 것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말인가. 애석하다. 만약 그대들의 말을 일찌감치 들었다면 내가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진정한 공부에 힘써서 소득이 이미 많지 않았겠는가. 지금 저 복서골이 천정에 뻗치고 이마가 넓으며, 명궁에 천곡성이 있고 정관이며, 관인이 상생하고 체용이 상응하는 점들은 비록 글공부하지 않더라도 귀하게 될 테니, 저기에 또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말에 남몰래 의혹을 품고 있다. 옛 성현과 달사(達士)들은 성공과 실패, 궁핍함과 영달함을 논할 때, 하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반드시 인사(人事)를 책망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질박하며 정직하고 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자는, 나라에서도 반드시 통달하며, 집안에서도 반드시 통달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에 허물이 적으면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복록이 그 안에 있다.’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르겠는가. 이광(李廣)은 항복한 병사를 죽여서 관상이 나빠졌고,*1 송상(宋庠)은 목숨을 살려주어서 관상이 좋아졌다지만,*2 공자는 몽기(蒙魌)처럼 생겼고, 양호(陽虎)도 몽기처럼 생겼다고 한다.*3 순(舜)임금은 눈동자가 두 개였지만, 항우(項羽)도 눈동자가 두 개였다. 이것이 과연 관상에 달린 것인가.
*1이광은……나빠졌고: 이광(李廣)은 한 문제(漢文帝) 때 명장으로, 흉노(匈奴)들이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그는 흉노 토벌하기 70여 전의 공을 세웠으나 제후로 봉(封)해지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 점성가 왕삭(王朔)에게 자신이 제후로 봉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왕삭이 이광에게 안타까웠던 일이 있었냐고 묻자 이광은 “농서 태수일 때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어서 제가 그들에게 항복을 권유해서 투항한 한 자가 8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제가 그들을 속여 같은 날에 모두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왕삭이 항복한 이들을 죽인 일이 빌미가 되어 제후로 봉해지지 못하였다고 답한다. 《史記 李將軍列傳》
*2송상은……좋아졌다지만: 송상(宋庠)은 북송 안주(安州) 안륙(安陸) 사람으로, 천성(天聖) 2년(1024) 진사가 되고, 황우(皇祐) 원년(1049) 재상이 되고, 나중에 거국공(莒國公)에 봉해졌다. 송상(宋庠), 송기(宋祁) 형제가 어렸을 때 어떤 승려가 “아우는 훗날 천하의 으뜸이 될 것이고, 형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그 승려가 다시 송씨 형제를 방문하였는데 송상을 보고 깜짝 놀라 “공(公)의 풍채가 마치 수백만 생명을 구한 자처럼 달라졌습니다.”라고 하며 특별한 일이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송상이 생각하다가 “아래채 아래에 개미굴이 있었는데, 홍수에 개미집이 물에 잠겨 장차 떼죽음을 당하게 되자 측은히 여겨 장난삼아 대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하여 개미들을 살려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후 둘 다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송기가 장원에 올랐다. 그런데 장헌후(章憲后)가 “아우가 형보다 먼저일 수 없다.”라고 하여 송상을 1등으로 하고 송기를 10등으로 하였다. 《類說 卷47 遯齋閒覽 編竹橋救蟻》
*3공자는……한다: 몽기(蒙魌)는 몽기(蒙倛)라고도 하는데, 옛날 정월에 역귀(疫鬼)를 쫓을 때 쓰는 신상(神像)으로 흉악한 모습이라고 한다.《순자(荀子)》에 중니의 모습은 얼굴이 몽기와 같다.[仲尼之状, 面如蒙倛.]”라고 하였고, 《설부(說郛)》에 “공자도 몽기처럼 생겼고, 양호도 몽기처럼 생겼다.[尼父如蒙魌, 陽虎亦如蒙魌.]”라고 하였다.
당나라 사람이 유혼(柳渾)*4의 명운을 추산하여,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하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하니, 유혼이 ‘성인의 가르침을 버리고 이단의 술법을 닦을 바에는 빨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따르지 않았으나, 유혼은 결국 장수하고 귀하게 되었다. 안노자(顔魯子)는 납갑법(納甲法)으로 주자(朱子)의 명운을 추산하여 『역경(易經)』 진괘(震卦)의 구사효(九四爻)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나,*5 주자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고 결국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이것이 과연 명운에 달려있는 것인가. 남괴(南蒯)는 황상(黃裳)의 점괘를 얻었으나 중정(中正)의 덕이 없었으니 그 점괘에는 합당하지 않았고,*6 목강(穆姜)은 택뢰(澤雷)의 괘사(卦辭)를 얻었으나 원형(元亨)의 덕이 없었으니 그 응답 또한 맞지 않았다.*7 이것 역시 점괘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4유혼(柳渾): 양(梁) 상서복야(尙書僕射) 유담(柳惔)의 6세손으로 초명은 재(載), 자(字)는 이광(夷曠) , 유심(惟深)이다. 10여 세 쯤 어떤 무당이 “아이의 관상이 천하고 요절할 테니 불도의 도를 닦아야 죽음을 늦출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부형들을 그 말을 따르려고 하였지만, 유혼은 “성인의 가르침을 버리고 이단의 술법을 닦을 바에는 빨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新唐書 柳渾列傳》
*5안노자는……하였지만: 진괘(震卦) 구사(九四)는 하나의 양효가 네 개의 음효에 갇힌 모습이다. 그래서 효사도 ‘진동함이 마침내 빠져버렸다.[震遂泥]’이다. 주희가 1183년(송 효종 순희10), 절동에서의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거처할 때 진동보(陳同甫)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진괘 구사효는 지난번 안노자(顔魯子)가 납갑(納甲)으로 저의 운명을 추론하여 바로 이 효에 해당한다고 하였는데, 그 설을 모르는 것이 항상 안타깝습니다. 이제 선생이 사리(事理)로 미루어서 맞추었는데, 이처럼 그의 말과 은밀히 부합하니, 이 일은 실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朱子大全 答陳同甫》
*6남괴는……않았고: 남괴(南蒯)는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이다. 노나라 계씨(季氏)의 읍재(邑宰)가 되었는데, 소공(昭公) 12년에 계평자(季平子)가 즉위하여 자기를 예우하지 않자 비읍(費邑)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하면서 점을 쳤는데, ‘곤지비(坤之比)’인 ‘황상원길(黃裳元吉)’의 점괘가 나왔다. 남괴는 이것을 크게 길한 점괘라고 여겨 반란을 일으켰는데,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곤괘의 육오효가 ‘황상원길’인 것은 신하로서 아래에 있으면서 중(中)을 지키고 있을 때 그렇다는 말이지 남괴처럼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이 점괘를 얻으면 크게 흉한 점괘가 되는데, 남괴는 ‘황상원길’이 크게 길하다는 뜻으로만 해석하였던 것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12年》
*7목강은……않았다: 목강(穆姜)은 노 성공(魯成公)의 모친인데, 숙손교여(叔孫僑如)와 간통하여 아들을 폐하고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가 좌절되자 별궁인 동궁(東宮)에 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처음 동궁에 갔을 때 점을 쳤는데, 중산간(重山艮)에서 택뢰수괘(澤雷隨卦)로 변하는 점을 만났다. 사관(史官)이 수괘는 나간다는 의미이니 동궁에서 속히 나가게 될 것이라고 하자, 목강은 수괘는 원형이정의 덕을 지니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런 덕도 없으니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9年》
이필(李泌)은 ‘군주와 재상은 명운을 만든다.’라고 하였는데,*8 나는 군주와 재상만이 명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 이하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명운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직 성인만이 명운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의리(義理)가 그를 주인으로 삼고 명운이 그 명령을 따르기 때문이다. 일반 서민이란 그 지위와 덕망이 귀하지도 천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 선악의 많고 적음에 따라 길흉의 응답이 있으니, 소옹(邵雍)은 ‘선하면 길하고, 악하면 흉하다.’라고 하였다. 길함은 복이 응하는 것이요, 흉함은 화가 숨어 있는 것이니, 선을 쌓으면 기운이 순수하고 가득 차 퍼지고, 악을 쌓으면 음침하고 웅크려 든다. 이는 ‘기상이 좋을 때 모든 일이 합당하다.’*9라는 말이니, 스스로 그 관상을 만든 경우이다.
*8이필은……하였는데: 당나라 이필(李泌)이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소위 예정론(豫定論)을 부정하면서, 덕종(德宗)에게 “대저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임금과 재상은 운명을 만들어 내니, 운명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운명을 말하면 더 이상 선인에게 상을 주고 악인에게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라고 간하였다. 《新唐書 李泌列傳》
*9기상이……합당하다: 형양공(滎陽公) 여희철(呂希哲)이 “처음 배우는 후생들은 기상을 이해하는 것부터 해야 하니, 기상이 좋을 때 모든 일이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宋名臣言行錄 卷65 呂希哲》
순경(荀卿)은 ‘제자들은 힘써 배울지어다. 하늘이 잊지 않을 것이다.’*10라고 하였고, 당고(唐臯)는 ‘합격하지 못할수록 더욱 힘써 노력해야 한다. 하늘이 어찌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11 신포서(申包胥)는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人衆則勝天]’라고 하였다. 왕존(王尊)은 몸으로 홍수를 막으려 하자 물이 그를 위해 물러갔고,*12 유곤(劉昆)은 화재 쪽으로 머리를 조아리니 불이 그로 인해 꺼졌다.*13 이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말이니, 스스로 그 명운을 만든 경우이다. 자산(子產)은 비조(裨竈)의 점괘를 듣지 않았고,*14 굴원(屈原)은 첨윤(詹尹)의 계책을 믿지 않았으며,*15 장공근(張公謹)은 거북점을 땅에 던졌고,*16 《주역(周易)》 혁괘(革卦)에도 ‘ 점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일이 의심할 바 없으면 점치지 않아도 결정된다.’라는 말이니, 스스로 그 점괘를 만든 경우이다.
*10제자들은……것이다: 이는 《순자(荀子)》 권26 〈부편(賦篇)〉에 보인다.
*11당고는……하였다: 당고(唐臯)는 명대 저명한 유학자이자 문인으로, 1514년(가정 9년) 44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인물이다. 그가 흡현(歙縣)의 향교에 있을 때 늘 장원을 스스로 상상하였으나 여러 차례 낙방하였다. 향리 사람들이 경성에는 그가 꺾은 버들가지가 많다고 놀리니 서실 벽에 “글공부할수록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니 당고가 그 명을 어찌하겠는가마는, 급제하지 않을수록 글공부하니 명이 당고를 어찌하겠는가.[愈讀愈不中, 唐皋其如命何? 愈不中愈讀, 命其如唐皋何?]”라고 써서 붙였다고 한다. 《堯山堂外紀》
*12왕존은……물러갔고: 왕존은 한 선제(漢宣帝)의 사람이다. 경조 윤(京兆尹)이 되어 도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왕존이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었을 때 황하가 범람하여 호자하(瓠子河) 금제(金堤)를 침범하였다. 왕존이 관리와 백성을 거느리고 나가 백마(白馬)를 잡아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몸으로 금제를 막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물이 불어나 금제가 무너지자, 관리와 백성이 모두 달아났으나 왕존이 동요하지 않고 서 있었는데, 물이 점점 물러갔다. 《漢書 王尊列傳》
*13유곤은……꺼졌다: 유곤(劉琨)은 중국 남북조시대 진(晉)나라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동진 3대 시걸(詩傑)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유곤이 강릉령(江陵令)이 되었을 때 민가에서 실화(失火)가 일어났다. 유곤이 불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니 반대쪽에서 바람이 불어 불을 꺼트렸다. 《鐫唐李瀚原本名蹟蒙求》
*14자산은……않았고: 비조(裨竈)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 대부로 점술에 능하고 천문학에 정통하였다. 소공(昭公) 17년에, 비조(裨竈)가 자산(子産)에게 “내가 관가(瓘斝)와 옥찬(玉瓚)을 써서 재난을 물리친다면, 우리 정나라에는 불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자산은 그가 어찌 천도를 알겠냐며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정나라에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春秋左氏傳 昭公 17年》
*15굴원은……않았으며: 굴원이 방출된 지 3년이 지나도록 임금을 만날 수가 없어서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을 찾아가 물어본 일이 있다. 굴원이 첨윤에게 “누가 나의 청렴과 정절을 알아 주겠는가.”라고 하소연하자, 첨윤이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행하면 되나니, 거북과 점풀인들 진실로 세상일을 다 알 수는 없도다.”라고 하였다. 《楚辭 卜居》
*16장공근은……던졌고: 장공근은 처음엔 왕세충(王世充) 밑에서 벼슬하다가 당 태종 이세민의 막하로 귀순하고부터 공을 많이 세워 추국공(鄒國公)에 봉해졌다. 이세민이 황태자인 이건성(李建成)을 죽이려 할 적에 복자(卜者)에게 거북점을 치게 하였는데, 장공근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거북을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점을 치는 목적은 의심스러운 일을 해결하고 망설이는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인데, 지금은 이미 사태가 의심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점을 칠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태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舊唐書 卷68 張公謹傳》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축(祝)ㆍ사(史)ㆍ의사(醫師)ㆍ복서(卜筮)는 두 가지 이상 하지 않으며 자기 고을을 나가서는 사(士)의 반열에 끼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무당, 의원, 농부, 장사꾼의 자식들도 본디 글을 배워 관직을 얻지 못할 뿐, 그들 중에도 육합(六合)에 해당하는 명운이 없을 리 없고, 사격(四格)에 해당하는 관상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이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 또한 사대부가 될 길이 없었다. 경성(京城)의 귀족 자제들은 그 기상과 격국이 어찌 반드시 술사들의 법도에 다 부합하겠는가마는, 대개 대대로 현달하고 영화를 누리는 이가 열 명 중 여덟아홉은 되니, 이것으로 근거로 삼아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이런 까닭에 그 일이 없으면 그 이치도 없고, 그 일이 있으면 그 이치도 있는 법이다. 만약 술사의 말에 좌절하여, 해야 할 일을 그만둔다면, 이는 모두 미혹된 짓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상과 명운과 점괘는 결국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내가 답하였다. “상수(象數)는 하늘이 아직 정해주지 않은 것이고, 사업(事業)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다하고, 선(善)을 실천하는 데 힘쓸 뿐이다. 그 마지막에 하늘이 사람을 이길 수 있는지, 사람이 하늘을 이길 수 있는지는 내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니, 이에 여러 술사들이 망연자실하여 서로 바라보며 웃으면서 “저희가 복종하겠습니다. 다시는 관상과 명운과 점괘를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이 설을 지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논설은 참으로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지향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벼슬에 진취(進取)하려는 뜻을 풀지 못한 듯하니, 식자(識者)들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응답하기를 “이것은 다만 공명(功名)을 끌어와서 증험했을 뿐입니다. 지금의 후진들은 스스로 자신의 기량과 운수를 헤아려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등한 사람이니, 어찌 성현을 바라겠는가. 성현은 저절로 하늘이 정해준 분수가 있다.’라고 말할 뿐이니, 이것은 하류에 머물기를 달갑게 여겨 결국 원대함을 바라지 않는 이들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지막 단락에서 ‘선(善)을 실천하는 데 힘쓸 뿐이다.’라고 한 말은 실로 의리를 바르게 하고 도를 밝히며, 공리(功利)를 따지지 않는다*17는 말에서 미루었습니다. 또한 생각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17실로……않는다: 이는 동중서(董仲舒)의 “무릇 인한 사람은 의리를 바르게 하고 이익은 도모하지 않으며, 도를 밝히고 공로는 계산하지 않는다.[夫仁人者, 正其誼,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余屢試不中, 問於諸術客曰: “君輩閱歷古今多矣, 若吾相與命數不當第耶?” 相者曰: “吾聞貴人, 伏犀貫天頂, 廣顙耳白, 今子色粹而視淸, 於法可謂寡慾者矣, 而縱紋在額, 眉左有痕, 貴則吾不知也.” 推數者曰: “吾以人生年月日時, 推驗其人之貴賤吉凶, 百無一失. 貴人者, 命宮有天哭, 官宮有紫微, 四星三奇而正官, 今子火多而木秀, 三奇而亂, 四官而偏, 可謂多才能文者矣, 而法不能貴也.” 卜筮者曰: “官文相生, 軆克用爻, 驛祿照榜者, 是爲必貴之占, 而今子福德在世, 夾以龍星. 大抵厚福之局, 而至如必中則吾未可信也.”
余詡詡然而失笑曰: “信如君輩之言, 則三者無一可者也. 是吾三十年來劬勤讀書, 用力於功令者, 皆爲虛假耳. 惜乎若早聞君輩之言, 吾舍功令而業眞工, 所得不已多乎? 今夫貫犀而廣顙, 命哭而官正, 與夫官文軆用之應者, 雖不讀書猶貴, 彼亦何憂之有, 雖然余竊有惑於君輩之言. 古之聖賢達士, 論成敗竆達, 未嘗諉之於天, 而必責之以人事. 孔子曰: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家必達, 在邦必達.’ 又曰: ‘言寡尤行寡悔, 祿在其中.’ 此言何謂也? 李廣殺降而相誤, 宋庠活命而相勝. 孔聖蒙魌, 而陽虎亦蒙魌. 大舜重瞳, 而項羽亦重瞳. 此果係於相者耶? 唐人推柳渾之命數, 而以爲祝髮從佛則可得長生, 渾曰: ‘去聖道爲異敎, 不若速死.’ 遂不從, 渾竟以壽貴. 顔魯子以納甲法推朱子之命數, 此之於震之九四, 而朱子不以爲然, 竟亦無驗焉. 此果係於命數乎? 南蒯得黃裳之繇, 而無中正之德, 則其占爲不當矣. 穆姜得澤雷之彖, 而無元亨之德, 則其應亦不叶矣, 此亦可信於卜筮耶? 李泌有言曰君相造命, 愚嘗以爲不獨君相之造命, 平人以下, 皆可以自造其命. 夫惟聖人不消言命者, 理義爲之主, 而命爲之聽令故也. 平人者其地位德望, 不貴不賤, 不賢不愚之稱也. 隨其善惡分數之多少, 而有吉凶之應焉, 邵子曰: ‘善則吉, 惡則凶.’ 吉者福之所應也, 凶者禍之所伏也, 積爲善則粹盎而胖舒, 積爲惡則陰慘而跼蹐. 所謂氣像好時百事是當, 此自造其相也. 荀卿曰: ‘弟子勉學, 天不忘也.’ 唐臯曰: ‘愈不中愈擧, 天其如臯何?’ 申包胥曰: ‘人衆則勝天.’ 王尊以身抗水而水爲之却, 劉昆叩頭向火而火爲之滅, 所謂朝聞道夕死可矣, 此自造其命也. 子產不聽裨竈之占, 屈原不信詹尹之策, 張公謹擲龜於地, 《易》曰: ‘未占有孚.’ 所謂事在不疑則不卜而决者也, 此自造其占者也. 《記》曰: ‘祝ㆍ史ㆍ卜ㆍ醫, 不貳事, 其出鄕, 不與士齒.’ 夫巫毉農賈之子, 固未嘗業文爲官耳, 其中未必無命數之當於六合, 相法之當於四格, 而彼固不做其事, 則亦無由作士大夫. 京城綺紈之家, 其氣像格局, 豈必盡當於術士之法? 而大抵世世顯榮, 什而八九, 則固不可以此準信也明矣. 是故無其事則無其理, 有其事則有其理. 若沮於術士之言, 而廢其當做之業, 則是皆惑也, 然則相法與命數與卜筮.”
“其終不可信歟?” 曰: “象數者天之未定者也, 事業者人之可能者也. 吾當盡吾力之所至, 彊於爲善而已 其終也天可勝人乎? 人可勝天乎? 非吾之所敢知也.” 於是諸術客茫然失圖, 相視而笑曰: “某伏矣, 不敢復言相命卜矣.”
余旣爲此說, 出以示人, 有謂之者曰: “子論誠確矣. 然審其指歸, 猶不釋進取之意, 得無爲識者之笑耶?” 余應之曰: “此特引功名來證耳. 今之後進, 自揣其氣力分數, 類多自畫者, 如曰: ‘我下等人也, 安敢望聖賢耶? 聖賢自有天定分限云爾.’ 則是不幾於甘處下流而卒無望於遠大者乎? 是故末段, 彊於爲善而已之云, 實自正誼明道, 不計功利之說推之, 盍亦思之哉?”
저자 이승배(李升培)는 자는 대언(大彦), 호는 수계(修溪), 월간(月澗) 이전(李㙉)의 7세손으로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상주 지역의 강세백(姜世白), 이경유(李敬儒)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죽우시사(竹雨詩社)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승배는 「죽우시사서(竹雨詩社序)」에서 죽우사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회(蘭亭會)와 버금간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승배는 1792년(정조 16) 25세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05년(순조 5) 대과에 급제하나 곧바로 낙방한다. 문집에는 당시 시류(時類)들이 끝까지 저지해서라고 하였다. 그 뒤로 벼슬에 대해 단념하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한다. 이 글은 그렇게 시험에 번번이 낙방한 시기 자신의 고심과 이후 삶의 방향 등에 대해 소회를 기록한 것이다.
유학에서 명운(命運)은 하늘이 정해줬다고 하지만, 넘지 못하는 난관이 계속되면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게 되는 법이다. 저자는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는 이유를 관상가, 명리가, 점술가에게 물어보았다. 세 사람 모두 이런 부분은 길한 데 반해 저런 부분은 흉하다고 하면서, 귀하게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잘하긴 하는데 특출나게 잘하는 건 아니란 뜻이다. 저자는 ‘일찌감치 그대들의 말을 들었다면 헛수고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라고 탄식하다가, 곧바로 개개인의 부귀영달은 천명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또한 이윤(伊尹)이 ‘한 사람이라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하면 시장에서 매를 맞는 것 같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는 《사기(史記)》, 《설부(說郛)》, 《주자대전(朱子大全)》 등에서 점괘, 사주, 관상 등이 명운에 직결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열거한다. 특히 남괴(南蒯)와 목강(穆姜)의 사례는 좋은 명운이 들어왔다 할지라도 덕을 갖추지 않으면 그 복을 받을 수 없음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지막으로 군주와 재상만 나라가 발전하도록 하는 명운을 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명운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과감하게 말하고서 술사의 말을 너무 믿지 말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힘닿는 데까지 하고 선(善)을 실천하는 데 힘쓸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마지막 부분은 발문(跋文), 후기인 셈인데, 거기서도 벗이 ‘과거 급제에 미련이 남은 것인가.’하고 농처럼 물어본 말에, ‘공리를 예로 든 것일 뿐 지금의 후진들은 스스로 자신의 기량과 운수를 헤아려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다.
어떤 수험생이 있다. 그 부모는 학생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다행히 올해는 시험 운이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학생은 그 운만 철석같이 믿고 공부하지 않아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이럴 경우 운수를 잘못 본 술사의 책임인가? 아니면 노력하지 않은 학생의 책임인가? 반대로 시험 운이 없다고 해서 학생이 이를 믿고 진짜로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아 낙방한다면, 이럴 경우 그 술사는 운수를 잘 봤다고 해야 하는가? 학생의 책임인가?
점술, 명리, 관상은 수천 년간 임상실험을 거쳐 데이터베이스화 된 일종의 학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늘 예외는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물음은 자신이 언제나 예외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인지해야 하며, 맞더라도 너무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불신하는 경우보다 맹신하는 경우가 더 심각하다. 이것이 오래되면 자기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남의 선택을 내 선택인양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즉, 삶을 대하고 명운을 대하는 자세란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행복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배우고 몰입하며 성장에 따라 자득(自得)하는 측면도 있고, 비대해진 욕심을 내려놓는 체념의 행복, 자기만족의 행복을 느끼는 측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어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다. 저자도 대과 급제에 대한 성취만 접었을 뿐, 끝까지 유학에 정진하고 시회(詩會)를 통해 여러 벗들과 교유하였다.
글쓴이 : 이도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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