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팔꿈치의 시간

백광욱 2025. 2. 6. 00:05

 

팔꿈치의 시간

 

팔꿈치가 이 책상을 떠나지 않도록 공들이며 여러 해를 보냈다.
엄격한 선생님을 마주하듯이 온종일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肘不離此, 功以歲計. 如對嚴師, 終日敬畏.

주불리차, 공이세계. 여대엄사, 종일경외.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 「책상에 새긴 글[案銘]」

 

시간은 만져지지 않는 채로 흘러가지만, 시간을 뚫고 살아낸 사람의 몸에는 흔적이 남는다. 예컨대 주름과 주근깨, 흉터와 굳은살 같은 것들. 몸 어딘가에 새겨진 짙은 얼룩은 그 사람이 어떤 사물과 얼마나 오랫동안 마찰하며 살아왔는지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살갗이 갈색빛으로 물든, 직선의 자국들이 이리저리 교차해 남아 있는 어떤 이의 팔꿈치를 바라본다. 책상 모서리에 팔꿈치를 대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을 사람의 시간이 덩달아 그려진다. 변색한 지경에 이른 팔꿈치는 어떤 이가 책상에서 분투한 시간의 길이를 반추할 수 있는 단서일 테다. 책상 앞에서 보낸 시간의 그림자들이 드리워지며 팔꿈치는 점점 캄캄해져 간다.
 
  조선의 여성 학자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형체 없는 공부의 열정과 학자의 자세를 현현(顯現)하고자 ‘팔꿈치[肘]’의 감각을 소환했다. 엄한 스승 대하듯 경건함으로 책상을 마주하고서 팔꿈치를 책상에 붙인 채 꼿꼿이 읽고 쓰는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왜 하필 팔꿈치를 빌려와 공부의 마음을 형상화했을까. 벼슬에 오르거나 영화를 누리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삼가며 살아가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던 강정일당이다. 책상과 접촉한 팔꿈치의 감각은 애쓰며 보내온 공부의 세월을 헤아릴 수 있는 증명의 언어였을 것이다. 닳도록 읽는 문장들이 마음에 쌓여 가는 동안 좁다란 책상에 단단히 딛고 힘주어 몸을 받쳐 주는 팔꿈치.
 
  팔꿈치가 책상에서 멀리 떠나가지 않고, 경외(敬畏)하는 책상으로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기 위한 다짐이 「안명(案銘)」에 담겨 있다. 책상 한 귀퉁이에 선명하게 새겨둔 열여섯 자의 명문(銘文)은 곧 정일당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언이었으리라. 집안 살림을 일구고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며 동시에 학자로서 공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정일당의 생활을 감안할 때, 이 「안명」에 각인해 둔 그의 의지는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정일당의 시 「밤에 앉아서[夜坐]」에는 ‘마음이 씻은 것처럼 맑아서, 성정이 활연히 드러나 보이네.[方寸淸如洗, 豁然見性情.]’라는 대목이 있다. 혼자서 좁은 방의 책상 앞에 앉아 겸허히 경서(經書)를 탐독하던 중 감응한 한밤의 공부가 이런 고아(高雅)한 시로 남았다. 책상과 책이 놓인 밤의 풍경 속에 호젓하게 놓여 있다가 불현듯 마음에 환히 불이 켜지는 경험을 해본 학자에게, 책상의 기억은 생의 간절한 의지처와도 같다.
 
  지난 공부의 한 시절 동안 내가 썼던 책상은 삼만 원짜리 조립식 흰색 책상이었다. 그 책상도 양 팔꿈치가 닿는 부분만 닳아서 흰색 칠이 다 벗겨졌다. 더 해지지 않도록 닳은 자리에 스티커를 붙여뒀었다. 알록달록한 스티커마저 색이 바래고 낡아질 때까지 그 책상에서 여러 글을 읽었고 나의 글들도 지을 수 있었다. 팔꿈치와 부딪으며 닳은 책상, 그리고 책상과 마찰하는 동안 조금 더 색이 짙어졌을 나의 팔꿈치는 한 시절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공부, 쓰고 싶은 글에 대한 결연함이 매번 나를 다시 책상 앞에 데려와 앉혔다. 어지러운 날들을 지나게 되더라도 책상 앞에서 고요히 책 읽고 글 쓰는 충분한 기쁨을 기억하는 사람의 생활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공부로 돌아와 앉는 학자의 성정이 강정일당의 책상에 새겨 있던 「안명」에 수렴해 있다.
 
글쓴이   :  최다정
  『한자 줍기』・『시가 된 미래에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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