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지 않는 이유
대각(臺閣)은 임금의 눈과 귀이니 침묵하는 습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臺閣, 人主之耳目, 而緘默之習, 可戒也.
대각, 인주지이목, 이함묵지습, 가계야.
조현명(趙顯命 1691~1752), 『귀록집(歸鹿集)』 권6, 「사직응지소(辭職應旨䟽)」
‘대각(臺閣)’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가리킨다. 두 관서는 임금에게 간언(諫言)하여 임금이나 신료, 정책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나아갈 방향을 조언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으면 마치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임금은 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반대로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나라는 잘 다스려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간언을 하는 대각의 용기와 정의감 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 필수적인 요건은 이들의 간언을 수용하는 임금의 태도이다. 시력과 청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눈과 귀가 수집한 정보를 뇌가 처리하고 행동을 지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각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조현명은 영조대 탕평정국의 핵심인물로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영조의 심기를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과하다 싶을 만큼 직설적이고 과감한 간언을 하여 징계를 받기도 하고 명예욕 때문에 간언을 한다는 영조의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은퇴하는 날까지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간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간언을 수용하는 임금의 태도에 대해서도 항상 문제의식이 컸다. 그가 사헌부 지평, 즉 대각에 있을 때 올린 상소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고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기라도 하면 번번이 따르려 하지 않으셨고, 따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혹 문제가 될만한 글귀를 꼬투리 잡아 질책하기도 하셨습니다. 경전(經傳)에서 도리를 논한 내용을 가져다 질책을 정당화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관원을 임명할 때에 간언한 사람을 꺼려서 박대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아, 이는 말세(末世)의 평범한 임금도 하지 않는 일인데 현명한 전하께서 이런 일을 하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오만한 음성과 낯빛 만으로도 천리(千里) 밖에 있는 사람이 오지 못하게 할만한데, 하물며 이렇게 의기(意氣)를 꺾고 물리치기까지 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무릇 영예를 좋아하고 치욕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지극히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강직한 말을 하여 비위를 거스르는 죄를 자초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로 인해 대각에는 올바른 기운이 사라지고 임금은 직언(直言)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지금까지 4년 동안 밤낮으로 쉴 틈 없이 정성을 다해 잘 다스리고자 노력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던 이유입니다.
- 조현명(趙顯命 1691~1752), 『귀록집(歸鹿集)』 권5, 「언사소(言事䟽)」
- 조현명(趙顯命 1691~1752), 『귀록집(歸鹿集)』 권5, 「언사소(言事䟽)」
유명한 실험이 있다. 개를 상자에 넣고 전기충격을 가한다. 상자A에는 누르면 전기가 끊어지는 스위치가 달려 있고 상자B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기충격이 시작되면 두 상자의 개 모두 고통을 피하기 위해 날뛴다. 그러다 상자A의 개는 우연히 스위치를 누르게 되고 충격이 멈춘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상자A의 개는 전기충격을 피하는 법을 학습하게 된다. 반면 어떻게 해도 충격을 피할 길이 없는 상자B의 개는 어느 순간 체념한다. 두 상자의 개를 다른 상자로 옮겨서 다시 전기충격을 가하면 상자A의 개는 스위치를 찾으려 하지만, 상자B의 개는 스위치가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심리학에서는 상자B에 있던 개의 상태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정의한다. 상자B의 개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학습한 것이다.
조현명이 보기에 영조의 즉위 이후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온힘을 다했으나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대각이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임금인 영조가 대각의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듣지 않은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말꼬투리를 잡아 혼을 내기도 하고,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과민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말을 한 사람을 공격한다면 할 말이 있어도 주저하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무기력을 학습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현명의 문제의식이었다.
이런 일은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현대에도 말을 해야 하는 사람과 잘 들어야 하는 사람의 관계가 수없이 존재한다. 기업, 학교, 기관 등 어느 조직이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있고, 올바른 결정을 위해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판단력, 추진력, 화려한 언변 등 좋은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해도 모든 업무, 모든 사안을 세세하게 파악하여 판단하고 추진하고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업무를 직접 수행하며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실무자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열린 마음으로 고민하고 더 많은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의 필수적인 자질이다. 하지만 살면서 실제로 보기는 쉽지 않은 희귀동물 같은 자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실무자들이 결국 무기력을 학습한 상태로 눈앞에 닥친 일만 적당히 처리하다가 퇴근을 한다.
따라서 어떤 조직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면 실무자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보다 결정권자가 실무자의 의견을 잘 듣는지를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의 뿌리는 보통 눈과 귀가 아니라 뇌에 있다.
글쓴이 : 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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