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 보듯 너를 본다
천심을 닮아 이 인(仁)을 본성으로 간직하니
몸에 가득한 것은 모두 살리기를 좋아하는 봄뜻이라오
벽에 써 붙인 여상의 글자 보기 부끄러우니
서(恕)를 미루어 나가려면 우선 차마 못하는 마음 가져야지
克肖天心性此仁 滿腔都是好生春 壁間愧視如傷字 推恕須從不忍人
극초천심성차인 만강도시호생춘 벽간괴시여상자 추서수종불인인
- 성혼(成渾, 1535년∼1598년) 『우계집』 우계선생속집권지일(牛溪先生續集卷之一)
「이몽응에게 주다〔贈李夢應〕」
녹록하지 않은 세상살이에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해사한 표정과 목소리라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차마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상흔이 있다. 지난여름, 마구 찢기어 상처투성이었던 마음으로‘삶은 종잇장 같은 것’이라는 글을 남기고 별이 된 선생님, 당신을 기억한다. 아니 내가 기억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기억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곧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상처, 내가 겪었으며, 곁에서 지켜보고도 손쓸 수 없었던 무수한 생채기들이 떠올랐다.
오래지 않아 그동안 무관심 속에 은폐되었던 다수의 참담한 죽음이 드러났다. 나는 수많은 밤낮을 슬픔과 눈물로 채웠다. 제물이 된 당신들을 위해 국화꽃을 놓으며 그 향기가 하늘에 닿기를 염원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묵념을 하며 당신들의 절망을 외면한 것을 한없이 자책하고 그 고통을 되새겼다. 생과 사의 기로에 놓인 또 다른 당신들이 더 이상 생을 놓지 않기를 기도했다. 당신들의 상처는 곧 나의 상처이기에.
성혼은 당시 진주 목사였던 몽응(夢應) 이제신(李濟臣)에게 보낸 시에서 수령의 지켜야 할 덕목으로 ‘시민여상(視民如傷)’을 강조했다. 시민여상은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의 ‘문왕은 백성들을 볼 때 다친 데가 있지 않은가 걱정하였으나 도를 열망하기를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에서 유래된 말이다. 백성을 사랑하기를 상처 돌보듯이 하는 시민여상은 본성의 어진 마음[仁]에서 우러난 애민 정신의 지극한 표현으로, 이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인지심(不忍之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시민여상(視民如傷)은 정치 지도자의 덕목으로만 국한하여 볼 것이 아니다. 시민여상은 보편도덕인 인(仁)의 의미를 구체화한 표현으로서 인(仁)의 이해와 실천에 도움을 준다. 인(仁)의 단서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주체와 그 마음을 유발하는 대상인 객체는 구분된다. 우물에 빠진 아이와 그것을 보고 측은지심을 느껴 구해주려는 행인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타인을 내 몸의 상처처럼 보는 것은 주체와 객체를 동일시함으로써 공감과 포용의 범위를 넓힌다. 내가 타인을 나의 상처로 여긴다고 해서 타인의 상처가 완전한 나의 것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여상은 그렇게 느끼도록 하겠다는 적극적인 도덕적 의지의 선언과도 같다.
나는 다시금 선언한다. 당신들의 상처는 나의 상처이며, 그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겠노라고. 변화를 위한 더디지만 꾸준한 인(仁)을 실천하여 새봄에는 당신들에게 지금보다 덜 부끄러운 내가 되겠다고. 가을 하늘의 푸르름은 더욱 짙어져 가고 내 마음의 국화향도 그윽이 깊어진다.
글쓴이 : 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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