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를 되돌아보며
융서촬요서(戎書撮要序)
《주역(周易)》 췌괘(萃卦)의 상전(象傳)에 “군자가 이를 통하여 뜻밖의 사태에 경계한다.”라고 하였고 기제괘(旣濟卦)의 상전(象傳)에 “근심을 생각하여 미리 방비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학산(鶴山) 위료옹(魏了翁, 1178~1237)*이 “내가 어려서 《주역(周易)》 을 읽었는데, ‘문을 겹으로 설치하고 목탁을 치며 밤에 순찰을 하여 도적에 대비한다.’와 ‘좋은 활과 화살로 천하에 위엄을 보인다.’라는 구절을 보고,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민심이 쉽게 동요하니, 황제(皇帝)와 요순(堯舜)일지라도 일에 앞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구나.’라고 매번 탄식하였다.”**라고 한 적이 있으니, 이것이 무비(武備)를 창제(創制)한 이유이다. 말세에 내려와서는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모사(謀士)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맹장(猛將)은 비오듯 쏟아졌으며, 영진(營陣)의 제도와 기습과 정공의 방법이 날로 새롭고 달마다 무성해져서 그 서적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수 있을 정도였다.
《易》〈萃〉之象曰:“君子以戒不虞。” 〈旣濟〉之象曰:“思患以豫防之。” 故魏鶴山嘗言:“余少讀易,見所謂‘門柝以待暴客,弧矢以威天下’,每歎風氣旣開,人情易動,雖黃帝堯舜,有不容不先事而爲慮者。” 此武備之所以創制,而降及叔季,戰爭不息,謀士如雲,猛將如雨,營陣之制、奇正之法,日新月盛,其書可以充棟而汗牛矣。
*위학산(魏鶴山)은 남송(南宋)의 학자이자 문신인 위료옹(魏了翁, 1178~1237)으로 학산은 그의 호이고 자는 화보(華父),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영종(寧宗) 경원(慶元) 원년(1199)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겸 동첨서추밀원사(同僉書樞密院事)에 이르렀으며, 주자를 사숙하여 진덕수(眞德秀)와 함께 이학(理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학산집(鶴山集)』 卷42 〈간주견사당기(簡州見思堂記)〉의 내용이다.
우리 동방은 천하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북쪽 국경 한 지역만 육지로 이어졌는데 태행산(太行山)이나 검각(劍閣)보다 더욱 험준한 첩첩산중이다. 이런 까닭에 고려에서 가장 험준하며 사마(士馬)가 제일 정예롭다. 그러므로 당태종과 수양제가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였음에도 콩알만한 백암성(白巖城)과 안시성(安市城)을 함락시키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실로 임금이 정사를 정교(政敎)를 수행하고 무비(武備)에 태만하지 않는다면 천만년 동안 뽑히지 않을 기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왕조가 개창한 뒤로 근심스러운 점은 남쪽 왜놈들과 북쪽 오랑캐뿐이니, 임진년의 변고와 남한산성의 맹약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 이후로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고 문관(文官)들은 안일해지고 무관(武官)들은 게을러져 오늘날에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너무나도 경박하고 타락해졌다.
惟我東,僻處一隅,三面阻海,惟北境一路,雖是陸沿,而疊嶂峻嶺,不啻如太行劍閣矣。是故形勢之險阻高麗爲最,而士馬之精强,亦莫此若也。故唐宗、隋帝,動天下之兵而不能下白巖、安市之一彈丸城者此也。苟其君長克修政敎,不墮武備,則可謂千萬歲不拔之基。而自我朝開創之後,所可憂者,只南倭北胡,而龍蛇之變、城下之盟,尙忍言哉?自玆以還,民不知兵,文恬武嬉,上下偸墮,至於今日而極矣。
噫,彼西敎之闖入潛滋暗長於域內者,殆六十年餘,而至丙寅秋,匪舶出没於京江,繼以有沁城失守之變,畿沿繹騷,幸兹王靈有赫,海氛廓淸,則爲左海生靈者, 曷不欣聳攢祝之也。然而一治一亂,天道之常也。安不忘危,聖智之事也。爲今日民憂國計者,安可無深長慮,而媕娿苟且,不思所以爲陰雨之備耶?
大凡天之生物也,雖微而昆虫之類,莫不有好生惡死之心,而其智慮甚密,其防衛甚嚴,故禽俛而啄,仰而四顧,獸深居而簡出,懼物之爲己害也。蜂蠆挾螫而居,黿鼈負介而處,牛以角掎之,馬以蹄踶之,魚以鱗護身,禽以爪搏物,鴟鶚爲繆牖之策,狐兔爲營窟之計,是莫非好生惡死之心,而各爲捍外制彼之術也。獨吾人可以不如彼微物耶?
當洋舶之至沁也,爲將帥者棄城而遁,爲軍民者望風而奔,京都士女莫不魚駭而獸竄,靡有指向者。此無他焉,是其平日無方畧之夙講者,無器械之預備者也。適玆吾季,冒據重任,從事於行陣之間,而其戎務之廢弛,竊嘗慨然于中矣。
自其後,嘗在元戎座【訓將申觀浩】【後改名櫶】論綢繆之策,語娓娓不置,而元戎嘗示之以所藏本一副武志。至若《武經總要》、《登壇必究》、《洴澼百金方》、《虎鈐經》,以至《海國圖志》等書,使之一覽而留神焉,則元戎之所以惠我季也者,固不淺淺矣。
其書浩汗,不可强記,凡有關於爲將之道、營陣之法、奇正之術、器械之精者,畧掇其緊要語可行於當今者,彙爲一通,凡若干篇。間以示予,要予以弁卷之文,則予何能盡知精妙之意,而捃摭之以副其意也。然而槩想其歸趣,則不越乎戒不虞豫防患之意也。是則元戎之所以惓惓於吾季,出示以寳藏全書。
성상 즉위 4년 정묘년 겨울에, 갈봉노초(葛峰老樵)가 서문을 쓰노라.
吾季能承接乎元戎之志,撮要成書者,俱可謂深得乎大易之微義也。是書之成,曷不爲國家幸,亦豈不爲生靈幸也哉?世之有留意於鞱鈐者,亦庶幾取法焉是本間。嘗竊附管見之所掇者,而畧錄于分類之下,覽者可悉。上之卽祚四年丁卯冬,葛峰老樵序。
병인양요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일어난 외침(外侵)이며, 서양의 무력을 처음으로 접한 전투였다. 무엇보다 병인양요는 서양 군대가 곧장 서울을 점령할 수 있음을 알려준 전투였다. 기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적군이 육로를 통하여 수도 서울을 함락하는 형태의 전쟁이었으므로 임금이 몽진(蒙塵)할 수 없게 될 위험성이 왜란과 호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병인양요 이듬해인 1867년 정월 좌참찬 신헌은 서울의 군병을 편성하여 훈련시키고[京兵團操],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포수를 선발하도록 장려하고[獎選鄕砲], 민보를 쌓도록 권장하고[勸設民堡], 북쪽 변경에 군사제도를 정비하고[北沿制兵], 내정을 잘 닦고[篤修內政], 서양 오랑캐의 변란을 살펴 헤아려야 한다[審料夷變]는 6개 항의 군사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민보의(民堡議)〉에 기반을 두어 『민보집설(民堡輯說)』을 편찬하였다.
또한 양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는 병서(兵書)도 필요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편찬된 책이 바로 『융서촬요(戎書撮要)』이다. 『융서촬요』는 병인양요, 그리고 신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이 편찬된 시기는 병인양요 직후인 1867년이고, 신헌 막하의 장수로 추정되는 이가 그의 지원을 받아 신헌 집안에 소장된 중국 병서들 중에 조선의 실정에 적합한 내용을 발췌 정리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헌의 『민보집설』에 수록하지 못한 향토병 육성, 산성 운영과 전차를 활용한 유격전, 서양 함선과의 전투 양상을 보탠 병서였다. 이는 종래 병서들의 편찬 목적이 관병 훈련에 중점을 맞췄던 것과 가장 크게 변별되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부분은 총기 부분에서 동모(銅冒), 즉 서양 총의 퍼커션 캡(Percussion Cap)을 도입하여 자체 제작하려고 한 점이다. 퍼커션 캡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화승총에서 화약 접시와 심지 부분이 탄피와 뇌관 구조로 대체된 형태이다. 조선에서는 아직까지 화승총을 사용하였는데* 이와 비교하면 날씨의 제약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는 시점과 실제로 총이 격발되는 시점 사이의 간극이 거의 사라지게 되므로 연사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
*조선에서는 1631년(인조9)에 서포(西砲)라는 이름의 수발식(燧發式), 플린트 락(flint lock)의 총을 입수하였고 이후 제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두 가지 난점이 있었으니 제조 비용이 조총보다 세 배나 비싼데다가 서양 부싯돌에 비해 동아시아 부싯돌은 강한 타격을 주어야 불이 붙어 운용 자체가 어려웠다. 또한 17세기 중반 이후 안정기인 동아시아 정세 속에 이미 대량으로 운용 중인 화승식 조총을 수석식 총으로 대체할 필요성도 낮아졌다. (세종대왕유적관리소, 『하멜특별전-효종과 하멜 이야기』, 세종대왕유적관리소, 2021, 28-29쪽;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 두 번째 이야기』, 국립진주박물관, 2023,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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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커션 캡(Percussion Cap)(출처-https://www.alamy.com) 『융서촬요』에서 동모제를 수록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그 의미가 크다. 조선에서는 개항 이후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의 화기를 수입하였는데, 1880년(고종17)이 되어서야 동모제 총기를 청나라를 통해 수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이 청(淸)의 유지개(游智開)에게 보낸 편지에, 역관 이용숙(李容肅)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첨부하였다. 거기에는 이용숙이 영평 지부 유지개를 만났다는 언급과 화륜선(火輪船) 구입에 30만 금이 들고 양화약(洋火藥), 동모약(銅帽藥)은 천진국(天津局)에서만 제조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유지개는 1872~1880년까지 영평 지부를 지냈으므로, 이를 『승정원일기』에서 이용숙이 역관으로 청나라에 들어간 해와 비교 고찰하면, 1880년 이후 보낸 편지로 보인다.* 이후에도 동모제 총기 도입은 난항을 겪는다. 유학 강기형(姜基馨)은 동모창(銅冒鎗)을 청나라에서 사오는 것보다 성능은 나쁘더라도 조선에서 화약과 조총을 더 많이 생산하면 될 일이라고 상소하였다.** 이는 국비 절감을 위한 발언이지만 그 성능 차이를 모르는 문사의 물정 모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동모제 총기의 정식 구매는 1883년(고종20)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융서촬요』에서 언급한 지 거의 17년이 되어서야 동모에 대해 인식이 바뀐 것이다. 『융서촬요』의 편찬자는 실무자로서 조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책이 신헌을 통해 집정자의 허락을 받았으면 조선이 강대국에 힘없이 종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嘉梧藁略』 冊11 〈寄游天愚書〉;『承政院日記』 高宗 17年 10月 28日.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11月 19日. ***이연세 등, 『역주 구한국외교문서-청안3』, 인천학연구원, 2019, 336-337쪽. 오늘날에도 세계는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인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한국도 언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지 모른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강력한 무력을 소유해야 한다. 이것이 『융서촬요』에서 언급한 벌의 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불우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연구개발이다. 우리나라가 인공위성 발사와 전투기를 자체 제작하면서 군사과학 강대국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연구개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연구개발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나라가 존망의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기에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적인 예로 에디슨이 오래가는 필라멘트를 개발하기까지 13개월 동안 6,000여 종이 넘는 재료를 사용했고, 7,000번 이상의 실험이 있었다. 연구개발이란 수많은 실패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성공으로 다가가는 정석인 것이다. |
글쓴이 : 이도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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