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기
외진 곳, 무슨 일인들 청진하지 않으랴.
세모에 술병만 늙은이와 짝하네.
적막한 게 점점 좋아지니 시은이 다 됐으니
느긋하다 조롱하지 말라. 우리 집 가난하니.
엄동설한에 굶은 닭은 모이 찾지 못하고
추운 날씨에 병든 말은 땔감 운반 못 하네.
해가 길어져 얼음이 다 녹기를 기다렸다가
봄에 낚시대 하나 매고 교외 못에 가야지.
窮居何事不淸眞궁거하사불청진
歲暮甁罍伴老身세모병뢰반노신
漸喜寂寥成市隱점희적요성시은
莫嘲疏緩任家貧막조소완임가빈
鷄飢雪凍難尋粒계기설동난심립
馬病天寒叵運薪마병천한파운신
會待日長氷泮盡회대일장빙반진
一竿歸及野塘春일간귀급야당춘
- 임상원(任相元, 1638~1697), 『염헌집(恬軒集)』 〈세모(歲暮)〉
< 해설 >
임상원(任相元)은 인조대 소론 문인으로 최석정(崔錫鼎), 최석항(崔錫恒), 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1688년(숙종14) 남구만 등이 견책당했을 때 도승지의 직책으로 쟁집(爭執)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장단 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도 민암(閔黯)을 논핵한 김중하(金重夏)에 대해 논계(論啓)를 정지하였다는 일로 대사헌 유하익(兪夏益) 등에게 논핵당하자 광주(廣州)에서 5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이 시는 그가 두문불출하던 1691년(숙종17)에 지었다. 수련에서 임상원은 은거의 즐거움에 대해 읊었다. 명리의 격전지인 서울에서 벗어나 광주에서 두문불출하니 마음이 깨끗하고 거짓이 없어졌다고 서술하였다. 두문불출 하다보면 적막하고 느긋한 생활을 지내며 마음 속 불화와 불평이 저절로 풀리지만, 반대급부로 반드시 가난을 불러온다. 사람은 일을 하여 재화를 벌어들여야 집안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 고금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경련의 닭과 말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인 듯하다. 겨울철 닭들은 주린 배를 참으며 모이를 찾지만 허탕 치고, 말도 먹은 게 없어 땔감을 지고 나를 힘이 없는 상태이다. 이대로라면 끼니도 거르고 온돌도 달구지 못한 채 겨울을 보내야 하지만 임상원은 오히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교외 못에 낚시하고 돌아오겠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쯤 되면 태연하다 못해 게으르고 아둔하다고 할 정도이다. 임상원이 언급한 시은(市隱)은 속세에 살면서 속세와 한 발짝 떨어진 시각에서 자유를 누리는 은자를 말한다. 이들은 바로 그 한 발짝 떨어진 시각이 주는 통찰력으로 세상을 아등바등하게 살지 않고 긴 호흡으로 흐름을 보면서 살아간다. 또한 이렇게 현실 너머의 미래를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는 마음가짐은 『논어』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선진(先進)편에서 공자와 제자들의 정치관(政治觀)을 묻고 답하는 에피소드이다. 공자가 자로(子路), 염구(冉求), 공서화(公西華) 등에게 등용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각기 국방, 농업, 외교 방면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는데, 증석(曾皙)은 엉뚱하게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공자는 증석의 대답만 인정하는데, 이것은 증석만 난세 이후의 삶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는 증석의 모습과 봄이 되어 교외에 낚시하러 가는 임상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느새 12월이다. 올해도 다 지났다. 펜데믹은 지나갔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아직 그 여파는 현재 진행 중이다. 고도 경제 성장은 한풀 꺾여 인구 절벽에 가계부채 등으로 뒤숭숭하고, 바다 건너에서는 지금도 전쟁이 한창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전 지구적 연합을 중시하였는데, 이제는 나라별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시대적 겨울인 것이다. 겨울에는 일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준비하여 마련한 것으로 견뎌야 하는 계절이다. 그리고 겨울을 지낼 때는 인내만 해서는 안 되고 자기만의 소소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조선 사대부들은 대부분 음주와 시짓기였지만 오늘날은 훨씬 다양한 취미활동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이다. 돈이 많은 부자보다 취미가 많은 부자가 인생의 겨울을 그리고 시대의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
글쓴이 :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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