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도(從政圖) 놀이
< 번역문 >
세간의 한가로운 이들이 모였을 때 할 일이 없으면 종이 몇 폭을 붙여 관직을 차례로 적은 뒤, 벼슬을 올리고 내리며 쫓아내고 등용하는 규칙을 붙이고 여섯 면이 되도록 깎은 나무의 각 면에 덕(德)‧훈(勳)‧문(文)‧무(武)‧탐(貪)‧연(軟) 여섯 글자를 새긴 주사위를 세 개 만든다. 다 갖추고 나면 몇 사람이 판을 앞에 두고 소리치며 주사위를 던져 얻은 끗수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강등시킨 뒤, 벼슬의 높낮이를 비교하여 승패를 결정한다. 이를 ‘종정도(從政圖)’라고 하니, 유래가 오래된 놀이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놀이를 좋아하지 않아 동류들이 하는 것을 보면 손을 저어 거절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호남에서 객살이를 할 때 하루는 우연히 들에 있는 정자에 걸어 갔는데, 손 몇 사람이 이 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곁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벼슬이 높아져 귀해지는 사람도 있고 벼슬이 낮아져 천해지는 사람도 있었으며, 처음에는 쫓겨났다가 끝내는 등용되거나 처음에는 등용되었다가 끝내는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 사이에 운수(運數)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무릇 벼슬이 높아져 귀해지는 자가 반드시 모두 현명하지는 않을 것이고, 벼슬이 낮아져 천해지는 자가 반드시 모두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 쫓겨났다가 끝내 등용되는 자가 어찌 처음에는 못했다가 나중에는 잘하게 된 것이겠으며, 처음에 등용되었다가 끝내 쫓겨나는 자가 어찌 처음에는 잘했다가 나중에는 못하게 된 것이겠는가. 벼슬이 오르고 내려가는 것, 쫓겨나고 등용되는 것을 현명함과 어리석음, 잘하고 못함을 가지고 논할 수 없다면, 단지 운이 있고 없고에 달린 것일 뿐이다.
아! 내가 보기에 지금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어찌 이 종정도 놀이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이는 운이 아니라, 눈치와 꾀를 부리는 지혜가 만들어내는 결과이다.”라고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 원문 >
世之游閑者, 群居無事, 則聯數幅之紙, 列敍官班爵秩, 而附以升降黜陟之法, 削木爲六面, 刻德勳文武貪軟六字於其面, 如此者凡三顆. 於是數人對局, 呼而擲之, 隨其所得, 而升黜其班秩, 視班秩之貴賤, 以決其輸嬴. 目之曰從政之圖, 其來蓋久. 余自少時, 不嗜此戲, 見儕輩爲之, 則必麾而去之. 歲丙申, 客于湖南, 一日, 偶步出野亭, 有數客方設此戲. 余從傍而諦視之, 有升而貴者, 有降而賤者, 或始黜而終陟, 或始陟而終黜, 疑亦有數存焉於其間也. 夫升而貴者, 未必皆賢, 降而賤者, 未必皆愚, 始黜而終陟者, 豈前拙而後巧, 始陟而終黜者, 豈前巧而後拙? 其所以升降黜陟者, 旣不可以賢愚巧拙論, 則但卜其偶不偶耳. 嗚呼! 余觀夫今之從政者, 其有不類乎是圖者耶! 或曰: “非偶也, 其機巧之智, 有以致之.”, 此說, 余未信之.
- 권필(權韠, 1569~1612), 『석주집(石洲集)』 외집 권1 「종정도 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설[從政圖說]」
< 해설 >
조선 중기의 문인 권필의 「종정도 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설」이란 작품이다. 종정도(從政圖)란 종경도(從卿圖), 승경도(陞卿圖)라고도 하는데,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하륜(河崙, 1347~1416)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에 설명되어 있듯이 커다란 종이에 벼슬 품계를 나열해놓고, 주사위를 던져 얻은 끗수에 따라 승진이나 강등, 파직과 등용이 결정되어 이로써 도달한 벼슬의 높낮이를 겨루는 놀이이다. 오늘날 하는 말로 하자면 말판놀이 혹은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즐긴 놀이는 아니었고, 중국에서는 당(唐)나라 때부터 이와 비슷한 투자선격(骰子選格)이란 놀이를 즐겼다. 가주 자사(嘉州刺史)를 지낸 이합(李郃, 808~873)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 당나라의 문인 방천리(房千里, ?~?)가 개성(開成) 3년(838)에 이 놀이를 즐기는 것을 보고 「투자선격의 서문[骰子選格序]」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주제의식 면에서 권필의 작품과 유사하며 권필도 어느 정도 이를 참고한 듯하다.
우리 조상들이 종정도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은 우리 문헌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성종(成宗)은 1479년 교년회(交年會)에서 신하들에게 술에 취해 자지 말고 탕전(帑錢)을 걸고 밤새 종정도 놀이를 즐길 것을 권하였다. 《成宗實錄 10年 12月 24日》 선조(宣祖) 때에는 청주(靑州)에 사는 이성남(李成男)‧이경상(李景祥)‧강효남(姜孝南) 등이 모여 술을 마시고 종정도 놀이를 하다가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혐의가 밝혀지지 않아 풀려나긴 했으나 사안이 중대하였으므로 한 달 넘게 조사가 이루어졌다. 《宣祖實錄 28年 11月 1日‧8日‧9日‧10日‧12日‧13日‧18日‧20日‧21日‧23日‧24日‧25日‧26日‧30日, 12月 1日‧6日》 또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도 왜란 중에 종정도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고, 《亂中日記 甲午 5月 31日》 광해군(光海君)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민인백(閔仁伯, 1552~1626)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원들이 모이면 종정도 놀이를 하거나 바둑을 둘 뿐 글은 전혀 읽지 않는다며 탄식하기도 하였다. 《苔泉集 卷5 記聞》 그 외에 종정도를 소재로 한 시나 산문도 존재한다. 권필의 「종정도 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설」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권필은 스물여덟 살 때 호남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사람들이 종정도 놀이를 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는 놀이가 진행됨에 따라 처음에 벼슬이 낮았는데 높아지거나 높았는데 낮아지는 경우, 혹은 처음에는 파직당했다가 복직되는 경우, 높이 등용되었다가 끝내는 파직당하는 경우 등 갖가지 진행 양상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저 한 판의 놀이에서 역전승을 거두거나 역전패를 당한 것에 불과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가상의 벼슬아치 한 사람의 벼슬살이를 상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종정도 놀이 한 판을 어느 벼슬아치의 벼슬살이라고 가정해보면, 그의 승진과 강등, 파직과 등용을 결정하는 주사위의 끗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운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주사위의 끗수, 즉 운수에 따라 널을 뛰는 벼슬살이는, 개인의 바람이나 능력, 노력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 권필은 주사위에 의해 결정되는 한 벼슬아치의 부침(浮沈)을 한 발짝 떨어져 살펴보며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벼슬살이 속에서 겪게 되는 부침은 당사자가 처음에 현명하고 잘하다가 나중에 어리석어지고 못 하게 되었다거나 처음에 어리석고 못 하다가 나중에 현명해지고 잘하게 되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즉 벼슬아치의 능력과 재주는 정해져 있지만, 그에 걸맞은 자리와 대우를 받는 것은 운수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운수에 의해 궁달(窮達)이 결정되는 당시의 벼슬길이 종정도 놀이와도 비슷하다고 한탄한 뒤, 반론을 가설하고 대답함으로써 글을 끝맺는다. 그는 혹자의 입을 빌려, 운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벼슬살이 속의 부침이 사실은 운수와 정국(政局)의 변화에 따라 눈치와 잔꾀로 기민하고 요령 있게 대처한 결과라고 반문한다. 일리가 있는 의견임에도 그는 이를 믿지 않는다고 일갈하였다. 마치 주사위의 끗수와도 같은 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벼슬살이지만, 그 안에서 요행을 위해 구차하고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권필의 꼿꼿한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능력이나 인품이 아닌 운에 의해 성패가 갈리는 당시의 관료사회의 분위기에 회의적이었고, 그곳에서 눈치와 잔꾀로 요행을 노리는 것도 못 할 짓이라 여겼다. 그는 자신이 종정도 놀음 같다고 말한 벼슬길에 평생 발을 들이지 않았고, 여러 차례 내려진 벼슬을 모두 사양하며 마흔넷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글쓴이 : 임영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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