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물건의 아이러니
언젠가부터 나는 책을 쉽게 읽는다. 책을 읽을 때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책의 저자와 내용에 별다른 권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저 점심 먹고 잠깐의 개운함을 위해 마시는 카페모카 한잔과 같다, 일회용 컵을 버리듯 책도 쉽게 버린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책이 ‘저렴한 물건’ 이라는 깨달음도 한몫했다.
책이 저렴한 혹은 상대적으로 ‘싸구려 물건‘이 라는 조금 극단적인 깨달음은 책에 대한 내 오랜 의문 하나를 더 크게 만들었다. 나는 커피를 잘 못 마시지만, 하루에 아이스 카페모카 한 잔은 늘 마시는 편이다. 간단한 점심식사 후 아이스 카페모카와 머핀 하나를 먹는 것은 내 오랜 즐거움이다. 카페모카는 한식이 주는 약간의 텁텁함을 달콤한 개운함으로 바꿔 주는 신기한 희석제이기 때문이다. 보통 아이스 카페모카 한 잔이 6500원 정도 한다. 카페모카 두세 잔의 가격이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다. 카페모카는 소장품이 아니라 단순 소비재이다. 또 대부분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서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 왜 책은, 자본주의의 매뉴얼에 따르면 커피 두 세 잔과 동일한 가치에 불과한 책은 여전히 이리도 무겁고 과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값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책이란 커피 한 잔처럼 순간의 개운함을 느낀 후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사람들은 무협지나 할리퀸 로맨스를 커피 한 잔처럼 가볍게 소비한다. 하지만 여전히 책이란 ‘커다란 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반드시 필요한 것’, ‘소중한 것’과 같은 둔중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심지어 무협지나 대중소설, 에세이 같은 책들을 경시하고, 그 저자나 독자에게 정도에 따른 멸시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소위 문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러한 경향이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책을 많이 읽는 계층일수록 심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커피 두어 잔 값에 불과한 책이라는 물건이 가진 이러한 ‘무게감’에 깊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 무게감은 아마도 책이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근본 인 힘 중의 하나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어느 대형 서점의 광고 문구처럼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믿음. 결국 책에 한 개인을, 그리고 시대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전제가 이 모든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김윤관, <아무튼, 서재>중에서
< 출처 : 행복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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