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1886년 7월 4일 23세의 청년이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양 문화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헐버트 박사는
교육자, 역사학자, 한글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문명화와 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헐버트 박사는 근대식 학교의 틀을 잡으면서 학생들에게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움뿐이다'라고
강조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조선에 들어온 지 3년 만에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순 한글로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사민필지'를 편찬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헐버트 박사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아리랑을 오선지에 음계를 붙여
최초의 아리랑 악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에도 이바지했습니다.
1903년에는 미국의 한 학회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기고하면서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조선의 독립 의지를
해외에 알리는 독립운동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었던 직후,
헐버트 박사는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권을 지키기 위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의 숨은 조력자로
우리나라의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들의
활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1910년 일본에 의해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3·1 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습니다.
그렇게 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던 중에
1949년 광복절을 맞아 국빈 자격으로 초청받게 됩니다.
86세가 된 헐버트 박사는 다시 한국 땅을 밟는 것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노환과 여독으로 일주일 뒤인 8월 5일 타계합니다.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을 거행하고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에 따라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히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헐버트 박사에게
1950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그리고 2014년 대한민국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 했습니다.
조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헐버트 박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을 향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작은 보답일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호머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 호머 헐버트 묘지 기념석 -
< 출처 : 따뜻한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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