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설날 아침에

백광욱 2023. 2. 13. 00:02

 

설날 아침에

 

새벽하늘 구름이 사방 얼어 있으니
남은 추위 아직 다 못 보낸 것이고
농민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지난밤 고기를 많이 잡는 꿈 꾸었다는데
주린 처지에 배부른 꿈을 꾸었다니
그게 귀신에게 조롱당한 것 아니겠나
지난해는 다행히도 조금 넉넉했었기에
마을 사람들과 웃고 떠들 수 있으니
여기에 다시 더 욕심을 낸다면
세상일 뜻과 달리 어긋남이 많을 것이니
기댈 것은 나라가 새로워져
예로써 인재를 모으는 것
수많은 눈이 대궐을 바라보고
여러 사람이 동량을 떠받치니
이제 산동의 조서가
진심으로 백성 고통 구제함을 보겠지
우리 백성들 이미 하늘 있으니
힘써 밭 갈고 씨 뿌리기만 하면 되고
나도 산속의 삶이 편안하여
꽃에 물 주느라 날마다 단지만 안고 사네

 

曉天雲四凍          효천운사동
餘寒未盡送          여한미진송
爛聽農人語          난청농인어
昨夜多魚夢          작야다어몽
毋乃飢夢飽          무내기몽포
適被神所弄          적피신소롱
去年幸少豐          거년행소풍
笑語閭里共          소어려리공
況復狃望蜀          황부뉴망촉
世事多缺空          세사다결공
所賴邦命新          소뢰방명신
禮羅急麟鳳          예라급린봉
萬目瞻象魏          만목첨상위
衆手扶梁棟          중수부량동
行見山東詔          행견산동조
悱惻救呻痛          비측구신통
吾民旣有天          오민기유천
但可力耕種          단가력경종
我亦山居安          아역산거안
灌花日抱甕          관화일포옹

- 황현(黃玹, 1855~1910), 『매천집(梅泉集)』 제3권, 「기해고(己亥稿)」. <설날 아침 느꺼운 마음이 있어 동파의 시운을 빌려 쓰다[元朝有感次東坡韻]>

 

이 시는 매천 황현이 45세가 되던 기해년(1899, 광무3)의 설날 아침에 쓴 시이다. 원일(元日), 원단(元旦), 원정(元正), 원신(元新), 원조(元朝),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신일(愼日), 달도(怛忉), 구정(舊正)이라고도 하는 설은 우리 민족 최고의 명절이다. ‘설날’이라는 단어의 ‘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설’의 어원에 대해서 ‘낯설다’라는 단어의 어근인 ‘설’에서 왔다는 이야기와 개시(開始)라는 뜻의 우리말 ‘선’이 날과 합해 ‘선날’이 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 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이야기,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삼가다’,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왔다는 이야기, 이수광이 『여지승람』에서 설날을 ‘달도일(怛忉日)’로 표기한 것을 근거로 ‘설’이 ‘서럽다’는 단어에서 왔다는 이야기 등이 있지만, 정확한 어원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어원이 어떤 것이든 설날이 한 해의 첫날이면서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을 뜻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설날을 명절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과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서도 설날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설날을 명절로 삼아 중요한 날로 여겨온 지는 하마 오래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설날을 기념하는 한시는 현재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까지 전하고 있다. 아마 삼국시대에도 지었겠지만, 남아 있는 문헌이 완전하지 않아 이 시기의 한시가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설날을 대상으로 하는 한시의 경우 대부분 설날 아침에 지어지는데,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는다. 한 해의 첫날이면서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인 설날 아침에 짓는 시이니 그 내용이 이런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황현의 시는 이와 조금 다르다. 황현 역시 설날 아침에 시를 지으며 이제 시작하는 한 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았지만, 그의 기대와 희망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이 시에서 황현은 조금 넉넉했던 지난해의 수확 때문에 웃고 떠들 수 있는 설날 아침에 안도하면서 더 큰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 시를 쓰기 2년 전인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뒤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고종의 정치에 상당히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황현은 더 큰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지만, 나라가 새로워져 예로써 인재를 모으고 있는 것에 기댄다고 했고, 그런 정치에 백성들의 시선이 쏠려 있으며, 조만간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산(賈山)이 문제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마지막 부분에서 황현은 『사기(史記)』의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에 나오는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는 말을 인용했지만, 이 시에서 백성이 가진 하늘은 먹을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포함하여 백성들이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하늘, 국가, 정치, 임금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황현이 살았던 시기의 어려움에 지금을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백성들의 팍팍한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해가 바뀌면 늘 새로운 기대를 가져보지만, 그 기대가 이루어진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과 어려움은 해가 갈수록 커져 왔고, 백성들이 믿고 기댈 수 있는 하늘은 점점 더 어둑해지고 멀어져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이다.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 하늘이 백성을 버리기 전에 백성이 먼저 하늘을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을, 또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라도 하늘이 제자리를 찾아 힘써 밭 갈고 씨 뿌리기만 하면 되는, 꽃에 물 주느라 단지만 안고 살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라면서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황현의 시를 통해 2023년은 우리 마음속에서 사그라드는 기대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글쓴이  :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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