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이 이세민보다 나은 이유
그 번영이 빨랐기에 쇠퇴가 빨랐으며
그 발전이 빨랐기에 퇴보가 쉬웠으니,
이는 사물의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其盛也驟, 故其衰也疾; 其進也速, 故其退也易, 盖物理然也.
기성야취, 고기쇠야질; 기진야속, 고기퇴야이, 개물리연야.
- 이천보(李天輔, 1698~1761), 『진암집(晉菴集)』 권7 「태종론(太宗論)」
이 말은 이천보가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두고 한 논평의 일부로, 지은 시기는 미상이다. 독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설명을 해두면, 이 「태종론」에 조선의 태종인 이방원(李芳遠)을 논한 내용은 전혀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세민은 아버지 고조(高祖)를 도와 수(隋)나라 말의 군웅(群雄)들을 제압하고 즉위 후 당나라의 번영을 이루어냈다. 이천보는 「태종론」에서, 당 태종이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전성기를 이룩했으나 아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왕업이 쇠퇴한 것을 두고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당 태종을 주 무왕(周武王)‧한 고조(漢高祖)와 비교하였다. 이 두 제왕은 살아생전에 전성기를 이룩한 게 아니다. 그러나 그 아들‧손자 대에 이르러 주나라와 한나라는 각각 성강지치(成康之治 성왕·강왕의 치세)와 문경지치(文景之治 문제·경제의 치세)라는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반면에 당 태종의 아들‧손자인 고종‧중종(中宗) 시대를 보면, 태평성대의 미명(美名)만 쫓던 당 태종은 결코 무왕‧고조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필자는 「태종론」을 보면서 문득 조선의 태종이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 이방원과 이세민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한 나라의 건국에 참여하여 형제를 제거하고 보위(寶位)에 올랐으며, 나라의 안정을 위해 노력한 점, 말년에 후계자를 교체한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천보처럼 둘의 후대를 비교해 보면, 당 고종‧중종과 조선의 세종(世宗)‧문종(文宗)은 그 차이가 매우 크다. 이방원의 치세는 세종‧문종 때에 비해 결코 조선의 전성기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종은 아버지의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조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또 문종은 노년의 세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였으며, 즉위 후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편찬하고 진법(陣法)과 군제(軍制)를 개편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이방원은 호랑이 등과 같은 옥좌에서 내려와 사후에도 한동안 나라의 안정이 이어졌다. 반면, 이세민은 죽을 때까지 제위(帝位)에 있다가 사후 수십 년 만에 하마터면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당나라가 완전히 망할 뻔했다. 더뎌 보여도 내실을 다져가는 국정 운영이야말로 나라의 장구한 발전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첩경(捷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쓴이 : 조준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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