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네, 예지몽의 시구를
철령을 넘으며
죽음도 달가운 처지, 만 리 변방에 유배되었건만
원통한 사정 밝히지 못했으니 아픔 어이 견디나
글을 알아 우환 겪은 일 난초와 회나무 똑같고
조짐이 시로 징험된 일 귀문관과 남관이 비슷한 듯
누가 젖은 땔나무 가져다 언 꿩을 굽는가
우선 건초로 나마 여윈 말을 먹이네
한양 소식은 이제부터 그만이지
한 달 넘도록 세 도(道)를 지나왔으니
萬里投荒死亦甘 만리투황사역감
深冤未暴痛何堪 심원미포통하감
憂因識字蘭均檜 우인식자란균회
兆已徵詩鬼似藍 조이징시귀사람
誰抱濕薪燔凍雉 수포습신번동치
且將枯草秣羸驂 차장고초말리참
秦京消息從玆斷 진경소식종자단
月旣更新道改三 월기경신도개삼
- 남용익(南龍翼, 1628~1692), 『호곡집(壺谷集)』 4권, 「유철령(踰鐵嶺)」
위의 시는 조선 후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호곡시화(壺谷詩話)』와 『기아(箕雅)』의 편저자인 남용익이 1691년(숙종17) 10월에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 가는 길에 철령을 넘으며 남긴 작품이다.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과 강원도 회양군(淮陽郡)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이 작품에는 변방 유배지로 향하는 작자의 심경과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남용익은 숙종 대 서인(西人)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숙종 기사년(1689, 숙종15)에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장희빈) 소생을 원자(元子 훗날의 경종)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南人)이 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이때 남용익은 이전에 대제학으로 지어 올렸던 반교문(頒敎文)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문외출송을 당했다. 그 후 2년 동안 고향인 양주(楊州)의 송산(松山)과 한강 동작진 일대를 전전하다가 결국 남인들의 공격으로 유배길에 올랐고, 이듬해인 1692년(숙종18)에 함경도 명천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이 시에서 남용익이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잘 담아내려 공을 들인 구절은 함련(頷聯)인데, 자신의 곤액을 이전 시대의 시참(詩讒)에 빗대어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시참(詩讒)은 무심코 지었던 시가 훗날 예언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함련의 첫 구는 남용익 자신은 반교문 때문에,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그가 지은 「왕복수재소거쌍회(王復秀才所居雙檜)」라는 시 때문에, 각각 유배와 좌천을 당한 동일한 처지를 말하였다. ‘난초[蘭]’는 남용익이 반교문에 썼다가 남인에게 장희빈을 천첩으로 모욕하였다는 무함을 받은 ‘몽란(蒙蘭)’ 두 글자를 뜻하고, 회나무[檜]는 소식이 지은 회나무 시를 가리킨다. 회나무 시에 “회나무 뿌리가 구천에 이르도록 굽은 곳이 없으니, 세간에선 오직 땅속에 숨은 용만이 알리라.[根到九泉無曲處 世間唯有蟄龍知]”라는 구절을 두고 소식의 정적(政敵)인 왕규(王珪)가 신종(神宗)의 신하가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무함을 하여 소식은 황주(黃州)로 좌천되고 말았다. 소식의 일은 송나라 신종 때의 필화(筆禍)인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함련의 두 번째 구는 남용익이 어릴 적에 지은 시구(詩句)와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조카 한상(韓湘)이 지은 시구가 각각 훗날 남용익의 유배와 한유의 좌천을 정확히 예언한 일을 말하고 있다. 귀문관은 함경도 경성(鏡城)에 있는 관문이고, 남관(藍關)은 중국 남전현(藍田縣)에 있는 관문이다.
한유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기 전에 한상(韓湘)이 술법으로 모란을 피웠는데, 그 꽃잎에 작은 금자(金字)로 “구름은 진령에 비껴있으니, 집은 어디쯤 있나? 눈은 남관에 가득 쌓여 말이 가지 못하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훗날 한유가 조주로 가다가 남관에 이르러 큰 눈을 만나고서야 이전에 한상이 지은 시구가 자신의 좌천을 예언한 시구임을 깨달았다는 일화가 있다.
남용익의 귀문관과 관련해서는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운양만록(雲陽漫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남용익이 어렸을 적에 꿈에서 네 구를 얻었는데, “머나먼 이역 땅에서 사람 만나는 일 적으니, 나그네 얼굴엔 시름만 가득하여라. 십 리 길에 쓸쓸히 비 내리는데, 나그네 어젯밤에 귀문관을 지나왔네.[絶域逢人少 羈愁上客顔 蕭蕭十里雨 夜度鬼門關]”라는 구절이다. 남용익은 꿈에서 깨어나 괴이한 일이라고 여겼다. 귀문관은 함경도 지역으로, 남용익은 이후로도 벼슬을 하면서 함경도로 발을 들인 적이 없었고 함경도 관찰사에 수망(首望)으로 추천되었으나 낙점(落點)을 받지 못해 함경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기사환국으로 인해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었으니, 명천은 바로 귀문관 너머에 있는 지역이었다.
결국 어린 시절 예지몽의 시구가 말년의 불운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남용익은 철령을 넘으면서 예지몽의 시구가 함경도 명천으로의 유배를 예언한 글귀임을 깨닫고는 당시의 착잡한 심정을 이 시에 담아내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이전의 문인들이 곤액을 당한 것처럼 자신도 시문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치고 대제학까지 역임했지만, 결국 글재주가 재앙의 빌미가 되어 말년의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용익은 예지몽에서 예언했던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인가. 명천 유배지에 도착한 후 깊숙이 들어앉아 독서만 하고 일체 시사(時事)에 대한 언급을 피하다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글쓴이 : 이승용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교육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멍하는 시간 (1) | 2023.01.04 |
---|---|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1) | 2022.12.25 |
보인정에서 (전남 곡성) (1) | 2022.12.20 |
횡탄정에서 (전남 곡성) (1) | 2022.12.14 |
동산정(東山亭)에서 (1) | 2022.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