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숲멍하는 시간

백광욱 2023. 1. 4. 00:04

 

숲멍하는 시간 

 

<  번역문 >

내가 남쪽 교외에서 한가로이 지낼 때에 맑고 화창한 날을 만날 때면 언제나 술 한 병 가지고 높은 산에 올라가 바위에 걸터앉아 눈길을 먼 곳으로 흘려보내곤 하였다. 구름 안개는 퍼졌다 걷혔다 하고 숲 속 나무는 흔들렸다 고요해지며 날짐승 들짐승들은 날아가거나 달려가며 울고 부르짖고, 물고기와 자라는 뜨고 잠기며 흩어졌다 모였다하는 백가지 천 가지의 변화무쌍한 모습이 내가 앉은 자리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구별해 보면 구름 안개와 숲 속 나무, 새와 짐승의 즐거움은 산에 속하고 물고기와 자라의 즐거움은 물에 속하지만, 합하여 하나로 보면 산에서 구름 안개와 숲 속 나무, 새와 짐승이 능히 퍼졌다 걷혔다 흔들렸다 고요해졌다 날아가다 달려가다 울다 부르짖고,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능히 뜨고 잠기며 흩어졌다 모인다. 내가 산수 사이에서 한가로이 자적하면서 만물과 그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늘에서 얻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으로 하늘의 광대함을 알았다.
한가로이 혼자 술을 마시다 거나하게 취하면, 저 퍼졌다 걷혔다 흔들렸다 고요해졌다가 날아가고 달려가다 울고 부르짖고 뜨고 잠기고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각각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내 즐거움을 즐기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안다. 저들이 그 즐거움을 스스로 즐기면서 나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도 내가 내 즐거움은 즐길 줄 알면서 저들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도 답을 얻을 수가 없어서 팔을 베고 잠이 들었는데 조금 뒤에 잠을 깨고 보니 눈과 귀로 보이고 들리는 것도 실로 그대였고 나의 즐거움 또한 다함이 없었다. 얼마 지나 구름은 산으로 돌아가고 새와 짐승은 숲으로 달려갔으며 물고기와 자라는 물속에 잠겼다. 나 역시 지팡이 짊어지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니 석양은 아직도 울타리 아래에 있었다. 이것으로 해가 길다는 것을 알았다.

 

< 원문 >

余閒居南野, 遇淸和日, 輒挈一壺陟崔嵬, 跂石而坐, 流目遠眺, 雲烟之舒卷, 林樹之動靜, 鳥獸之飛走鳴號, 魚鼈之浮潛散合 變態百千, 不離吾几席之間. 區以別之, 則雲烟林樹鳥獸之樂, 屬乎山, 魚鼈之樂, 屬乎水. 合以一之, 則雲烟林樹鳥獸之能舒卷動靜飛走鳴號于山, 魚鼈之能浮潛散合於水. 吾之所以優遊自適乎山水之間, 而與萬物同其樂者, 盖皆得乎天而然耳, 是以知天之大也. 悠然自酌, 陶然以醉, 不知夫舒卷動靜飛走鳴號浮潛散合者, 果各有其樂, 而知吾之樂吾樂否. 彼之自樂其樂而不知吾之樂, 亦猶吾之能樂吾樂而不知彼之樂否. 思之不獲, 曲肱以睡, 俄然覺則耳目之所聞見者固自若也, 而吾之樂又無窮矣. 旣而雲歸山鳥獸趍林, 魚鼈沉于水, 而吾亦負策詠歌, 徐步而歸, 則夕陽猶在藩籬之下矣. 是以知日之長也.

 

- 남유용(南有容, 1698~1773), 『뇌연집(䨓淵集)』 권13 「자암의 글씨에 붙인 발문(自庵大筆跋)」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에는 바삐 구경하고 다니는 것보다 한곳에 머물며 산이나 물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선호한다. 최근에 ‘불멍’, ‘숲멍’, ‘물멍’과 같은 말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나만이 즐기는 독특한 여행법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산이나 물, 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어떤 즐거움을 주냐고 묻는다면 딱히 뭐라 대답할지는 모르겠다.

 

남유용의 「자암의 대필에 붙인 발문(自庵大筆跋)」도 일종의 숲멍에 대한 경험을 쓴 글이다. 자암의 대필은 16세기 명필 김구(金絿)의 “고요함 속에 하늘은 광대하고, 한가한 가운데 해는 길다[靜裏天大 閒中日長]”라는 글씨이다. 원래부터 하늘은 광대하고 해의 길이도 일정할 텐데, 왜 고요하고 한가한 가운데서 새삼 느낄 수 있다는 것인가. 남유용은 “오사모에 띠를 두르고 길에서 호령이나 하며 달려가는 자와는 하늘의 광대함을 말하기에 부족하다. 부지런히 잇속이나 챙기면서 자신의 처자식을 돌아보며 있네 없네 말하는 자와는 해가 긴 것을 말하기에 부족하다.”라는 형 남유상(南有常)의 말을 떠올리며 김구의 글씨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당장의 이익과 권력을 좇느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광대한 하늘과 장구한 시간을 돌아볼 여유란 없다.

 

남유용은 이어 산에 올라가 풍경과 만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내려왔던 한가한 어느 날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산속의 변화무쌍한 만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 안에 충만해지는 즐거움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만물이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광대한 하늘 아래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느 유학자의 격물치지 공부처럼 만물에 내재한 심오한 이치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숲멍’과 같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자신과 만물에 밀도 있게 집중하고 나니 하루 해가 길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남유용으로서는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경험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조정의 고위 관료로 누구보다도 바쁜 삶을 살았을 남유용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보낸 시간은 그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2022년 한해도 이제 저물어간다. 이맘때면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돌아보니 순식간에 일 년이 지나간 느낌이다.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살아왔으니 올 한해도 그리 잘못 산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 바쁜 것은 잘살고 있음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아니던가. 하지만 때로 바쁘게 살면서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유용의 글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광대한 하늘과 긴 시간 속에 놓인 자신을 한 번쯤 멍하게 응시하기를 권한다. 삶의 의미와 같은 거창한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속으로 충만해지는 즐거움은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멍한 시간은 그저 멍하게만 낭비해버리는 시간은 또 아닐 것이다.

 

글쓴이  :  하지영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