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먹고 눈멀고 마음 고요한 이의집
< 번역문 >
이른바 귀머거리는 스스로 들을 수 없어 사람들과 듣는 것을 가지고 다툴 일이 없고 장님은 스스로 볼 수 없어 사람들과 보는 것을 가지고 다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다〔無用〕고 하지요. 그러나 노인께서 귀머거리도 아니고 장님도 아닌 것을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귀먹지 않은 것을 귀먹었다고 하고 눈멀지 않은 것을 눈멀었다고 하여 쓸모없음을 구하려 한다면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노인께서는 어찌 그 마음과 함께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노인께서 집에 계실 때에 눈과 귀를 기쁘게 해주는 사물이 있는데 노인께서 이를 막으면서 기쁘지 않다 여기신다면 이는 저 기뻐할 만한 것이 벌써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대저 사물이 마음에 있다면 이목을 쓰지 않은 것이라 하겠습니까? 반드시 그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冥心〕 보고 들은 외물로 하여금 맞아들이지도 않고 막지도 않고 오로지 주장함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이 정신과 더불어 노닐게 하여 귀는 눈과 함께 잊고 눈은 귀와 함께 잊고 마음은 눈과 귀와 함께 잊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참으로 무용(無用)이라 이를 수 있고 비로소 함께 대도(大道)를 말할 수 있고 비로소 그 몸을 보존하여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노인께서는 어찌하여 그 마음과 함께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 원문 >
雖然所謂聾者, 不能自聞也, 人無與爭其聞矣, 瞽者不能自見也, 人無與爭其見矣, 故因謂之無用. 叟之不聾且瞽, 衆人之所知也, 而欲聾其所不聾, 瞽其所不瞽, 以求無用, 人其信諸? 叟何不幷與其心而聾瞽之哉! 叟居家, 物之有悅乎耳目, 而叟乃拒之不爲悅, 是彼之可悅者, 已入乎心也. 夫物之在心, 耳目有不爲用者乎. 必也冥其心, 使物之在耳目, 無將迎無拒塞, 無適無莫, 與神而遊, 而至於耳與目忘, 目與耳忘, 心與耳目忘, 始可謂夫眞無用也, 始可與言大道也, 始可以養其身終其天年也, 叟何不幷與其心而聾瞽之哉!
- 남유용(南有容, 1698~1773), 『뇌연집(䨓淵集)』 권13 「농고와기(聾瞽窩記)」
1740년 경 부풍자(扶風子) 남용성(南龍成)은 부여 땅 어느 곳에 자신의 집을 짓고 ‘농고와(聾瞽窩)’라고 이름하였다. 귀먹고 눈먼 이의 집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보고 듣는 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장님과 귀머거리처럼 스스로 무용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뜻을 당호에 부쳤다. 부풍자의 발언은 일견 장애인 비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옛사람들은 시각, 청각 장애인이 외물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다고 믿고 종종 ‘농(聾)’ ‘고(瞽)’와 같은 글자를 자신들의 호로 쓰곤 하였다. 무용함이 오히려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 유용함을 뽐내다가 스스로 화를 초래했던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남유용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던 이들을 기억하며 부풍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과 귀로 들어오는 외물을 애써 막는 것이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는 진정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감각을 통해 얻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이미 외물이 들어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남유용은 이에 명심(冥心)을 제안한다. 명심을 현대어로 번역하자니 간단치 않다. 장자의 사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도 하고 불교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남유용이 말한 대로 “마음 씀이 없는 상태〔無用〕”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명심을 통해 감각으로 들어오는 외물을 정신과 어울리게 내버려두고 감각과 마음의 지각까지 잊어 대도(大道)를 깨닫는 데에 나아간다. 장자(莊子)가 말한 좌망(坐忘)의 경지이기도 하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대상을 받아들이며 나의 감각과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 도리어 온전히 나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유용이 말한 명심(冥心)은 18세기의 새로운 화두였다. 박지원은 연행 길에서 하룻밤 만에 황하 강줄기를 아홉 번이나 건넌 일을 『열하일기』에 기록하였다. 낮에는 세찬 소용돌이에 정신이 팔려 강물 소리가 귀에 채 들어오지 않았는데, 한밤중에는 물결이 보이지 않는 대신 우레와 같은 강물 소리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명심을 통해 나와 강물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러 눈과 귀로 들어오는 외물에 더 이상 동요하지 않게 되는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의 물결은 박지원이 건넜던 황하의 물결보다 세차다. 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마구 흔들리노라면 부풍자처럼 눈과 귀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나를 온전히 지키고 싶다면 먼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있는 그대로 물결을 마주하라. 남유용과 박지원이 우리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글쓴이 : 하지영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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