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임금의 넋을 달랜 또 한 명의 충신
< 번역문 >
또 아뢰기를,
“경기, 공충, 강원 삼도의 유생인 유학 홍선용(洪善容) 등의 상언에 ‘문경공(文景公) 박충원(朴忠元)을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충원은 영월 군수로 재직하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단묘(端廟)를 가까이서 모시고 옥음(玉音)을 친히 받들어 마침내 옛 봉분을 찾아내 소장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로부터 분묘를 개축하여 비로소 배향(陪享)하는 일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그 충렬(忠烈)을 논하자면 거의 육신(六臣)과 아름다움을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전에 사림(士林)의 상소에서 홍주(洪州)의 노은사(魯恩祠)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의 복계에 ‘노은사는 불가하나 영월은 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여러 선비의 청은 영월에 배향하는 데 있으니, 이 지역에 근거하여 이 사당에 모시는 것은 곧 공의(公議)가 찬동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는 향사(祠享)에 관계된 일이니, 대신(大臣)에게 문의한 뒤 상께 여쭈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
< 원문 >
又啓言: “京畿公忠江原三道儒生幼學洪善容等上言, 以爲請文景公朴忠元, 躋享於寧越彰節祠云. 朴忠元, 以寧越郡守, 忽於神思怳惚之中, 昵陪端廟, 親承玊音, 遂訪隧封, 陳章上聞. 朝家自是改築邱陵, 始擧陪享, 論其忠烈, 殆與六臣竝美. 而年前士林疏請躋享於洪州魯恩祠, 廟堂覆啓以魯恩則不可, 寧越則可矣云云. 今此多士之請, 乃在寧越, 則因是地同是祠, 正是公議之所同. 事係祠享, 請問議大臣稟處?” 允之.
- 『일성록(日省錄)』 순조 11년 3월 20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은 중종~선조 연간 중앙 조정에서 활동하며 문한 요직을 두루 역임한 관료 문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문으로 크게 이름나 사가독서(賜暇讀書) 관원으로 선발되었으며, 명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고 명종대에 대제학(大提學)까지 오르는 등 16세기 중반 문단의 정점에 위치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족적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의 이름은 ‘저명한 문사’로서 보다는 ‘단종(端宗)의 원혼을 달랜 충신’으로서 더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다.
젊은 시절 박충원은 강원도 영월(寧越)의 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영월에서는 전임 군수들이 연이어 임지에서 사망하는 괴이한 일이 속출하고 있었다. 지역민들은 그것이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의 원한과 관련이 있다고들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폐위된 뒤 이곳에 유배되어 짧은 생을 마감하였을 뿐 아니라, 사후에도 시휘(時諱)로 인해 그 묘소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박충원은 즉시 단종의 묘소를 찾아 정비하고 조정에 글을 올려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청함으로써, 그의 원혼을 달래고 지역 민심을 안정시켰다. 당시 그는 단종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을 직접 지어 올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련한 넋을 위로하는 절절한 마음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후대까지 명문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王室之冑 왕실의 맏아들이요
幼沖之辟 나이 어린 임금이셨는데
適丁否運 마침 비운의 때를 만나서
遜于僻邑 궁벽한 고을로 옮겨 오셨네
一片靑山 한 조각 푸른 산을 떠도는
萬古孤魂 만고의 외로운 혼이시여
庶幾降臨 바라건대 강림하시어
式歆苾芬 변변찮은 제수나마 흠향하소서
이처럼 박충원은 당시의 암묵적인 금기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묘역을 재정비하고 그에 대한 제사를 정상화하였다는 점에서, 또 한 명의 ‘단종 충신’으로서 조선 후기에 빈번히 거론되었다. 박충원이 옛 묘역을 찾아 개수하고 넋을 달랜 이야기가 각종 문헌 기록에 두루 수록되어 전승되었음은 물론, 단종이 박충원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암시하였다거나 성삼문(成三問)의 혼이 단종의 제사를 회복해 준 박충원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는 등의 신이한 내용들이 후대에 새로이 덧붙여져 유통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화는 그가 1758년(영조34)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려받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명분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박충원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이 점차적으로 고조‧확장되어 가는 분위기 아래, 19세기 초에는 그를 사육신(死六臣)의 사당에 배향해 ‘단종 충신’의 일원으로 공인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1808년(순조8) 4월 공충도(公忠道)의 유생 김재규(金載奎) 등 250인이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모시고 있는 홍주(洪州) 노은서원(魯恩書院)에 박충원을 추배(追配)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이들은 박충원이 단종의 묘소를 다시 찾아 제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 최초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도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된 전례가 있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며 배향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다만 이들의 청은 박충원과 직접적인 연고가 없는 노은서원에 배향하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하다는 조정의 논의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조정의 판단이 내려지고 3년 뒤인 1811년(순조8), 이번에는 박충원과 직접적인 연고가 있는 곳, 즉 영월에 소재한 창절사에 그를 모시도록 해 달라는 상언(上言)이 올라왔다. 이는 공충도뿐 아니라 경기, 강원 지역 인사까지 합세한 ‘삼도(三道) 유생’의 연명 상언으로서, 박충원 추배에 대한 여론이 이전보다 한층 증폭된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단종 묘역의 회복에 기여한 박충원의 공적과 3년 전 지역적 연관성의 부족을 이유로 노은서원 추배를 반려 당한 사실을 근거로, 연고가 분명한 창절사에 그를 받들 수 있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건사(四件事, 본처와 첩의 분별에 관한 일[嫡妾分別] · 억울하게 형벌을 받은 일[刑戮及身] · 아버지와 아들의 분별에 관한 일[父子分別] · 양민과 천민의 분별에 관한 일[良賤辨別])’에 해당하는 사안이 아니면 상언을 할 수 없다는 규정상의 이유를 들어 조정에서는 이번에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이후로 박충원의 사당 배향을 국가적으로 승인받고자 하는 움직임은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켜켜이 쌓여 온 사림 사회의 여망과 그 공론화 작업은 결국 최종적인 성취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지만, 이와 같은 상소와 상언의 기록은 단종 추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박충원의 이름과 그의 현양을 통해 또 한 명의 충신을 발굴하고자 했던 당대인들의 노력을 뚜렷이 기억하도록 해준다. 현재 영월 장릉(莊陵) 경내에는 1970년대에 세워진 낙촌기적비(駱村紀蹟碑)가 자리하고 있어, 어린 임금의 원통한 넋을 달래주었던 박충원의 행적과 공로를 뒤늦게나마 밝혀주고 있다.
글쓴이 : 정용건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21사업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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