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을 나서야 하는 이유
옛사람들은 세상을 두루 유람하고, 한곳에 얽매여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古之人 周觀博遊 恥匏繫一隅
고지인 주관박유 치포계일우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어우집(於于集)』 권4 「증금강산삼장암소사미자중서(贈金剛山三藏菴小沙彌慈仲序)」
유몽인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4세(1622) 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옆 삼장암(三藏菴)의 승려 법견(法堅)이 젊은 제자 자중(慈仲)을 보내 글을 청했는데, 위는 그때 써준 글의 첫 부분이다. 법견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승장(義僧將)으로 활약하였다.
유몽인은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弱冠) 때부터 산수 유람을 나섰다. 삼각산·천마산·설악산·금강산 일대를 보았고, 마천령을 지나고 장백산을 넘어 두만강에 이르렀으며, 칠보산·묘향산·구월산까지 우리나라 온 산하를 두루 유람하였다. 중국도 세 번이나 다녀와 요동에서 북경까지 그 아름다운 경관을 다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사마천(司馬遷)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였다.
그런 그가, 중국 역사상 이름났던 이들의 학문과 문장력은 유람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확언하였다. 공자의 높은 학문과 세상을 보는 직관력은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통해 성취되었고, 사마천의 탁월한 문장력은 그의 원유(遠遊)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두보(杜甫)가 난리를 만나 천하를 떠돌지 않았다면,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과 소식(蘇軾)이 좌천되어 천하를 두루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과연 그들의 식견이 완성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하였다.
학생들과 마주하면 늘 여행에 나서라고 권한다. 아니, 원근을 가리지 말고 일단 나서라고 강권하다시피 한다. 공부하라고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여행에 나서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임을, 그동안 숱한 학생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는 여행에서 돌아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러니 강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쓴이 : 강정화
경상국립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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